【고양시 마을 이야기 열여섯 번째】

XⅥ. 고봉동(高峰洞) 

고봉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산서구와 덕양구 그리고 파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산동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법정동으로는 문봉동, 사리현동, 지영동, 설문동, 성석동을 관할하며 농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고봉동은 일산동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1. 고봉동 현황
▲행정동 : 고봉동
▲법정동 : 문봉동, 사리현동, 지영동, 설문동, 성석동
▲인구 : 25,092명(8,943세대) / 24통 115반 (2017년 8월 말 기준)
▲면적 : 24.95㎢
▲주민센터 : 경기도 일산동구 성현로397-18

2. 마을의 변천사
▲ 문봉동
고양군 사리대면 죽원상패리 > 고양군 사리대면 문봉리 >고양군 벽제면 문봉리 > 고양군 벽제읍 문봉리> 고양시 고봉동 > 고양시 일산구 고봉동
▲사리현동
고양군 사리대면 사리현리 >고양군 벽제면 사리현리 >고양군 벽제읍 사리현리 > 고양시 고봉동 > 고양시 일산구 고봉동
▲지영동
고양군 사리대면 죽원 상패리 >고양군 사리대면 지영리 >고양군 벽제면 지영리 > 고양군 벽제읍 지영리 > 고양시 고봉동> 고양시 일산구 고봉동
▲설문동
고양군 사리대면 죽원 하패리 >고양군 사리대면 설문리 >고양군 벽제면 설문리 > 고양군 벽제읍 설문리 > 고양시 고봉동 > 고양시 일산구 고봉동
▲성석동
고양군 구이동면 성동리 > 고양군 구이면 성동 >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 고양시 고봉동 > 고양시 일산구 고봉동

고봉동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고봉동(高峰洞)

고봉동은 1992년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되면서 설치된 행정동으로 고봉이란 명칭은 마을에 고양 지역의 주산(主山)인 고봉산(해발 208.6m)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양지역의 주산이 고봉산

(2) 문봉동(文峯洞)
문봉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북쪽 방향에 위치하며, 고봉동주민센터가 있는 고봉동 중심마을 중 한 곳이다. 주로 단독주택, 창고와 작은 상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봉의 지명유래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때 빙석촌 입구에 고양팔현을 모신 문봉서원(文峰書院)이 있었기 때문에 문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문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7년(1870) 훼철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복원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예부터 글을 숭상하는 마을로 '문(文)'을 받들던 동네라고 하여 문봉이라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 마을 앞쪽에 있는 견달산 봉우리의 생김새가 마치 붓과 같아 큰 문장가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뜻에서 문봉(文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문봉동에 있는 독산은 예전에 봉화가 있어 봉화뚝으로도 불리웠다.

문봉동의 자연촌락으로는 안촌, 빙석촌, 하마패, 상촌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 안촌(安村) : 문봉동의 대표적인 마을로 안씨(安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촌마을 앞에 있는 비석

▲빙석촌 : 문봉동의 유래가 된 문봉서원이 있던 마을로 겨울이 되면 마을 앞쪽 벌판이 유난히 추워 들판이 자주 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이면 들판이 자주 얼었던 빙석촌

▲하마(下馬)패 : 고양팔현을 모셨던 문봉서원을 지나갈 때,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고 가라는 뜻에서 하마패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상촌(上村) : 마을이 위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촌 앞에 있는 비석

(3) 사리현동 (砂里峴洞)
사리현동은 견달산 아래쪽에 있으며, 일산방향으로 성현로를 따라가면 좌우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을 사리현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마을 앞에 흐르는 곡릉천이 많은 '모래(砂)를 운반해 마을 뒤편의 큰 고개(峴)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곡릉천에 의해 운반된 모래로 큰 고개를 만들었다는 사리현동

사리현동의 옛 지명으로는 새터, 댓골, 월현, 단지모퉁이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새터 : 오래 전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마을 주민들이 '새롭게 터를 잡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롭게 터를 잡고 사는 마을인 새터마을

▲댓골 : 이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월현(月峴) : 이 마을에서 바라보는 달 모양이 너무 아름다워서 월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사리현동에서 볼 때 달빛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의 모습이 예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단지모퉁이 : 이 마을에 있던 단지연(丹芝淵)이란 연못 근처에 붉은(丹) 풀(芝)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파트 단지로 개발된 단지모퉁이

(4) 지영동(芝英洞)
고양시 중심에서 동북쪽 방향에 있으며, 마을 앞에는 곡릉천이 흐르고 있다. 지영동의 한자표기는 지영(芝靈)이었으나, 일제시대 때 지영(芝英)으로 표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과 곡릉천 인근에 연꽃과 난초 그리고 기이한 풀들이 많이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지영동을 흐르는 곡릉천

지영동의 옛 지명으로는 우거촌, 아랫말, 오목촌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우거촌 :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몸시 가난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거지촌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현재의 우거촌은 논밭과 창고, 일부 주택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랫말 : 마을의 위치가 아래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오목촌(梧木村) : 웃말이라고도 불리며, 마을이 산속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 속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오목촌은 현재 창고가 많은 마을이다.

(5) 설문동(雪門洞)
설문동은 파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 흐르는 곡릉천이 파주 봉일천 지역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으며, 넓은 벌판은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마을이다. 설문동의 지명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설(卨)씨 문중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일제시대 행정지명 개칭사업이 진행되면서 한자표기가 설문(雪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설문동은 농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설문동의 자연촌락으로는 신촌리, 은골, 상학동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신촌리 : 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학동 : 이 마을에 소나무가 많았는데, 학이 날아와 앉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이 날아와 소나무에 앉았다는 상학동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은골 : 마을 주변에 산이 많고 마을이 깊은 곳에 있어 전쟁이 일어날 때 숨기 좋은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6) 성석동(城石洞)
성석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북서쪽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파주시와 인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성석이라는 지명은 고봉산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고봉산은 고양지역의 중요한 군사지역으로 이곳에 성(城)을 돌(石)을 이용해서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유래로는 마을이 고봉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산으로 병풍을 쳐놓은 듯하다'고 해서 성석동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성석동의 자연촌락으로는 잣골, 사당골, 함못이, 두테비, 진밭, 마골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잣골 : 고봉산성과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한글 이름으로 한문으로는 성동(城洞)이라고 불린다.

성동(城洞)의 한글 이름인 잣골

▲사당골 : 이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서당골로 불리다가 사당골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례로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당골과 전통가옥

▲함못이 : 조선시대 때 이 곳에 묘를 쓰게 된 함종 어씨 문중이 묘소와 함께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사람들이 이 지역을 함종 어씨의 연못이란 의미에서 함못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두테비 : 이 마을이 두테비라 불려진 이유는 마을 앞 야산에 두꺼비 형상을 한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 야산에 두꺼비 형상의 바위에서 유래된 두테비마을

▲진밭 : 마을 곳곳에 샘이 있어 물이 풍부해서 밭이 진 곳, 즉 진밭이 되었다고 한다.

물이 풍부해서 밭이 진 곳이었던 진밭

▲마골(마동) :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서 죽은 말들을 묻으면서 말무덤(마총)으로 부르다가 오늘날 마골이 되었다고 한다.

죽은 말들을 묻었던 마골

4. 마을의 명소
(1) 홍이상 선생 묘 및 신도비

홍이상 선생(1549~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인상(麟祥), 자는 원례(元禮)∙군서(君瑞), 호는 모당(慕堂)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수(修)의 아들이다. 고양팔현(高陽八賢)의 한 사람인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인으로서 선조 6년 (157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6년 뒤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와 호조 좌랑, 파랑을 거쳤으며 정언수찬, 지제교(知製敎), 병조정랑(兵曺正郞)을 지냈다. 사가독서를 한 후에 교리, 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서 왕을 평양까지 호종(扈從)하여 병조참의에 전임되었다. 선조 27년 (1594)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상도 관찰사로 외직을 맡았는데, 비변사(備邊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왜장끼리의 이간책을 강구하여 성공시켰다. 전란이 끝난 뒤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나, 영남의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올린 성혼(成渾) 배척상소를 극구 반박하였으며, 성혼을 변호하다가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청주목사가 되고, 광해군 즉위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파간의 계속되는 옥사에 염증을 느끼고 모든 관직을 버렸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에 제향된 고양팔현의 한 사람이다. 묘는 부인 안동 김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고양팔현의 한 분이신 홍이상 선생
부인 안동 김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뒤에서 바라 본 홍이상 선생 묘
홍이상 선생 신도비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제 제13호
▲찾아가는 길 : 묘(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로 97), 신도비(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로 111)

(2) 계원군 묘 및 신도비
계원군 이의(李艤)는 조선 중기의 학자∙종친(宗親)으로서 자는 의지(艤之), 제2대 정종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백성수 이원(李源)이다. 4세 때 이미 문자를 해득했고, 일찍이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한 학행으로 성종14년(1483) 계림부수에 제수되었다.
연산군 8년(1502) 시예(試藝)에 장원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 승헌대부, 돈령부도정을 지냈으며 중종 26년(1531) 계원군(桂原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민(長敏)이다.
묘는 여흥현부인 민씨와 쌍분을 이루어 남동향으로 조성되어 있다. 계원군 묘소는 진례군, 백성군, 계원군의 3대가 모셔져 있다. 진례군은 계원군의 조부이고, 백성군은 계원군의 부친이다.

계원군의 사당인 벽오재
계원군의 묘와 신도비 전경
가장 아래가 진례군, 가운데가 계원군, 가장 위쪽이 백성군의 묘소이다.
계원군 묘 전경
묘는 여흥현부인 민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현로138번길 150

(3) 느티나무(보호수)
문봉동 상촌마을에 위치하는 이 나무는 동공이 있고, 나무뿌리부터  5m 지점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으며, 주된 가지는 대부분 남쪽을 향한 수세가 좋은 보호수이다.

주된 가지 대부분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뿌리로부터 5m 지점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다.

▲지정번호 : 경기-고양-8
▲수령 : 약 235년 ▲수고 : 16m ▲나무둘레 : 3m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49

(4) 이천우 선생 묘 및 신도비
이천우 선생(? ~1417)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다. 고려말 공민왕 18년(1369) 동령부의 수령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몇 차례 왜구를 물리쳤으며,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이천우 선생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천우가 퇴직할 때(1416년) 태종은 "경이 큰 공을 세웠는데 아직 보답을 못하였으니, 좋은 논 80결과 노비 80명을 상으로 내리노라."라고 하였는데 이천우는 극구 사양하면서 “저 손토시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매를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태종이 매사냥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천우는 '매사냥 때문에 정사에 소홀하시면 안된다'는 충고를 간접적으로 한 것이다. 이에 태종은 웃으면서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화공에게 명하여 이천우의 화상과 두 마리의 매를 그리게 하고, 두 마리 매와 함께 하사하여 그의 지혜로운 행동을 기리도록 했다고 한다. <인용 = 고양시 티스토리>

이천우 선생 묘 입구 모습
이천우 선생 신도비각
두 마리 매 조각상이 이천우 선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7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고봉로531번길 144

(5) 성석 진밭두레패
성석동 진밭두레패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포호미걸이와 함께 고양시의 대표적인 특징성이 있는 민속놀이, 전통농악대로 유명하다. 진밭두레패가 전수되고 있는 곳은 일산동구 고봉동에 속해 있는 성석동 진밭마을로 이 마을에는 지경다지는 소리를 비롯해 농사소리 등 민요를 부를 수 있는 선소리꾼, 온갖 악기를 다루는 잽이꾼, 춤꾼, 법고잽이꾼 등의 보존회원이 있다. 진밭두레패 농악놀이는 농사 작업기에 본 농악으로 등장하며 모두 12마당놀이를 갖추고 있다. 농악의 가락은 1채 가락으로부터 12채 가락까지 다양한 변형가락을 갖추고 있으며 이중 12채 가락은 춤가락이며, 자진모리 가락에서 율동을 하게 된다.
두레패의 특징은 제금이 있는 것과 법고(벅구)의 숫자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다른 농악대에서는 제금을 쉽게 볼 수 없는데, 이 두레패에는 반드시 포함된다. 이러한 특징은 고양시의 대표적인 두레패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특이점으로 꼽을 수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무형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인용 = 고양시 역사이야기>

향토문화재 제42호인 진밭두레패 <사진 = 고양시 역사이야기>
고양시의 대표적인 두레패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고양시 역사이야기>
이전마을회관에 있는 진밭패두레보존회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42호
▲찾아가는 길 : 진밭두레패보존회(이전마을회관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진밭로 13)

5. 현대의 고봉동

고봉산이 있는 큰 마을인 고봉동
고봉동은 농촌마을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농촌마을이다.

고양시 전체 면적의 9.23%에 해당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고봉동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파주시와 연결하는 고봉로와 고봉동 지역을 횡단하는 성현로가 주요 도로이며, 견달산과 봉화산이 위치하고 있다. 일부 고층 아파트 지역을 제외하고 논과 밭, 주택과 창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으로 전통과 농촌의 모습이 잘 남아있는 풍요로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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