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일곱 번째】

Ⅶ. 원신동(元新洞)

원신동은 고양시 39개 행정동 중 8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마을로 남쪽으로는 성사동과 흥도동을 마주보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공릉천을 사이에 두고 관산동ㆍ고양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행정동이다.
원당동과 신원동을 법정동으로 관할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2000년대 삼송택지개발 사업과 함께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마을이다.

원당동과 신원동을 관할하고 있는 원신동

1. 원신동 현황
▲행정동 : 원신동
▲법정동 : 원당동, 신원동 / 18통 110반
▲인구 : 20,055명 / 7,810세대 (2017년 6월 기준)
▲면적 : 12.69㎢
▲주민센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1261

2. 마을의 변천사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신원리 >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신원리 >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신원동

원신동 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원신동(元新洞)

원당동(元堂洞)의 '원'자와 신원동(新院洞)의 '신'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1992년 시 승격과 함께 두 법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의 이름이 되었다.

(2) 원당동(元堂洞)
원당은 1413년 고봉현이 고양현이 되면서 군청을 비롯한 관아가 이곳에 들어선 최초의 관아지(地)이다. 이 때문에 고양지역 행정의 중심지가 되면서 '으뜸 원(元)'에 '집 당(堂)'자를 사용하여 원당리(元堂里)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원당에서 정승이 많이 나고, 그 분들의 묘자리가 널리 쓰이던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원당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원당동에 있는 공양왕릉

원당동의 자연촌락에는 왕릉골, 진텃말, 청대골, 루동, 제청말, 원당골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왕릉골 : 고려 34대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무덤이 있어 왕릉이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조선초기부터 불리고 있는 마을 이름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조선시대 왕손과 사대부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공양왕과 조선시대 왕손의 무덤이 있는 왕릉골 마을

▲진텃말 :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대골 : 마을 주민들이 예전부터 청태콩을 많이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루동 : 왕릉골 동쪽에 있는 자연촌락으로 마을에 공양왕과 관련된 누각이 있어 루동(樓洞)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원당골 : 낙타고개 아래에 위치한 자연촌락으로 원당동에 있는 골짜기란 의미에서 원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논과 밭이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인 원당골

▲ 제청말 : 조선시대에 공주와 부마를 제사 지내는 제청(祭廳)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3) 신원동(新院洞)
이곳을 '신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신원마을이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대로 상에 새롭게 생긴 고을이라고 해서 신원(新院)이 되었다고 한다. 새원이라고도 불렸으며, 새원을 한자로 쓰면 신원이 된다. 두 번째 유래는 월산대군의 궁 이름이 신원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신원동의 자연촌락에는 능골, 물구리, 조관동, 한우물, 송강마을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능골 : 마을에 있는 월산대군의 묘소가 마치 왕릉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능골마을에는 조선 전기부터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곳곳에 월산대군의 유적 및 후손들의 묘소가 있다.

마을에 있는 월산대군 묘소에서 유래된 능골마을

▲물구리 :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물구리는 마을에 자연우물 등이 있어 물이 풍족한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풍족하다고 해서 붙여진 물구리 마을

▲조관동 : 신원동의 대표적인 자연촌락이었으나 현재는 삼송택지개발지역에 포함되어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이곳을 조관동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월산대군이 별장을 짓고 머물러 있을 때 이곳에서 관리들이 옷을 관복으로 갈아입고 문안을 준비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원동의 대표적인 자연촌락이었던 조원동에는 현재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한우물 : 마을에 수량이 많고, 차가운 기운이 인근에서 유명한 우물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송강마을 : 조선조 중기부터 사용된 지명으로 송강 정철 선생께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선생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송강마을 초입에 있는 공원에 자리잡은 송강정철 시비

4. 마을의 명소
(1) 월산대군 사당

월산대군(1454~1488)은 조선9대 성종의 친형으로 이름은 이정(李婷), 호는 풍월정이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성종은 월산대군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의 집에 있는 정자 이름을 풍월정(風月亭)이라 지어주었다고 한다. 사당은 숙종 19년(1693) 이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정조 10년(1786)에 이미 있던 건물들을 다시 지은 것이다. 영조가 직접 석광사란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정조ㆍ순조 때에는 조정에서 신하가 나와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마을 초입에 있는 비석으로 이곳에서 250m 올라가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월산대군 사당 전경
뒤에서 바라 본 사당 모습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신원동 427번지

(2) 회화나무(보호수)
신원동 능골마을 월산대군 사당 앞 뜰에 위치해 있는 회화나무다. 이 나무로 부터 남쪽으로 5m지점에서  떨어져 있는 작은 나무는 본래 어미나무라 하며, 옛부터 작은 나무는 이씨 집안의 자손이라 불렀고, 큰 나무를 외손이라 했는데, 큰 나무가 작은 나뭇가지보다 잎이 무성해 외손 집안이 더욱 번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월산대군 사당 앞 뜰에 있는 수령 250년 회화나무

▲보호수 지정번호 : 경기-고양-23
▲수령 : 250년 / 높이 : 20m / 나무둘레 : 2.4m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427번지

(3) 월산대군 묘 및 신도비
월산대군 묘는 큼직한 봉분 앞에 묘비∙상석∙장명등과 좌우에 망주석∙문인석과 신도비 등의 조선전기 석조물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또한 월산 대군의 봉분 위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이 있는 특이한 구조로 조선시대 묘제(墓制)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해당 주소지로 가면 길 오른 편에 월산대군묘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월산대군묘와 신도비
정면에서 바라 본 월산대군 묘
월산대군과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이 앞뒤로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유적 제1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16-35

(4) 서삼릉

<자료 = 문화재청>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 제200호인 「고양 서삼릉(西三陵)」은 중종의 계비이며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의 예릉(睿陵)이 조성되면서 3릉(희릉, 효릉, 예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과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서삼릉에 옮겨와 있다.
또한 서삼릉 비공개지역에는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후 연산군 사친 폐비윤씨의 회묘(懷墓) 등 왕의 후궁들과 자녀들의 묘, 그리고 태실이 옮겨와 있다.

▲희릉 :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모신 단릉
▲효릉 : 제12대 인종과 왕비 인성왕후 박씨를 모신 쌍릉
▲예릉 : 제25대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김씨를 모신 쌍릉
▲소경원 :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원
▲의령원 : 사도세자의 맏아들이자 정조의 형인 의손세자의 원
▲효창원 : 제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
▲희묘 : 제10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
▲태실 :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모아 놓은 곳

서삼릉 입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2009년 6월 30일 등재) 비석
서삼릉 관람도
예릉은 제25대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김씨를 모신 쌍릉이다. <사진=문화재청>
효릉은 제12대 인종과 왕비 인성왕후 박씨를 모신 쌍릉이다. <사진=문화재청>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모신 단릉이다.<사진=문화재청>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모아 놓은 태실<사진=문화재청>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 200호 / 2009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찾아가는 길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5) 공양왕릉
고려의 마지막 왕인 34대 고양왕(1345~1394)과 왕비 순비 노씨의 무덤으로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왕, 오른쪽이 왕비의 봉분이다. 공양왕은 왕위에 오른지 4년 만인 1392년에 공양군(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원주, 삼척으로 옮겨진 후 1394년(조선 태조 3)에 5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416년(태종 16)에 다시 왕으로 복권되어 왕릉이 되었다. 왕릉 뒤로는 공양왕의 외손들인 정(鄭)씨, 신(申)씨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이 공양왕, 오른쪽이 왕비의 봉분이다. 뒤쪽에는 외손들의 묘가 있다.
측면에서 바라 본 공양왕릉
공양왕릉 뒤에서 보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 191호
▲찾아가는 길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6

(6) 덕명교비
신원동에 위치한 덕명교비는 한양과 한반도 북부지방 및 중국을 연결하는 의주길 관서대로 구간 중 신원동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내용을 기록으로 표기해 둔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의 건립자는 이한(李瀚)과 당시 고양 군수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유후성(柳後聖) 그리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윤면지(尹勉之), 이상식, 홍시우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으로 되어 있다. 즉, 주민 760여 명이 모두 힘을 합쳐 공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고, 그 명단을 자세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내용을 기록해둔 덕명교비
덕명교비는 삼송우남퍼스트빌 107동과 산책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2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통일로 374 (삼송우남퍼스트빌 107동과 산책길 사이)

(7) 송강마을
조선시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가사문학의 거장 송강 정철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마을이다. 정철 선생은 서울 장위동에서 출생했지만, 고양 신원동에 부모님의 묘소가 있어 10여년을 머물면서 풍류를 읊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신원동 송강마을에는 그의 자취를 기념하는 송강문학관과 시비가 있고, 공릉천에는 송강보 등 많은 자취가 남아 있다.

송강마을로 들어가기 전 마을 입구 공원에는 송강시비가 위치해 있다.
송강마을에 있는 송강문학관

5. 현대의 원신동

하늘에서 본 고양 화훼단지 모습 <사진 = 고양시청 블로그>

원신동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나, 삼송택지개발 사업과 더불어 도ㆍ농 복합동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을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삼릉 등 고려의 왕릉과 조선의 왕릉이 한 지역 있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마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월산대군 사당 및 묘, 송강문학관, 송강누리길 등 다수의 유적지가 즐비한 문화ㆍ역사의 보고이면서 원당동 지역에 고양 화훼단지가 있어 고양시 화훼산업의 중심 지역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원신동은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건축물이 공존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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