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열네 번째】

XⅣ. 효자동(孝子洞)

효자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서울시 은평구, 종로구, 강북구, 성북구 및 경기도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법정동으로 효자동, 지축동과 북한동이 있다. 고양시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으며, 마을에 북한산이 있어 해발고도도 가장 높다. 또한 창릉천의 발원지가 되는 자연에 둘러 쌓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효자 박태성의 이야기에서 유래가 된 효자동

1. 효자동 현황
▲행정동 : 효자동
▲법정동 : 효자동, 지축동, 북한동
▲인구 : 2,469명(1,249세대) / 6통22반
▲면적 : 25.35㎢
▲주민센터 : 경기도 덕양구 일영로 61

2. 마을의 변천사
▲효자동
경성부 은평면  >고양군 하도면 청담리 >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지축동
양주군 신혈면 > 고양군 신혈면 지축리 > 고양군 신도면 지축리 > 고양군 신도읍 지축리>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지축동
▲북한동
양주군 신혈면 > 고양군 신혈면 진관내리 > 고양군 신도면 북한리 > 고양군 신도읍 북한리>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북한동

효자동 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효자동(孝子洞)

효자동의 지명 유례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효자 박태성의 이야기와 함께 박태성 무덤과 효자비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효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효자동 지명 유례가 된 효자 박태성 묘

효자동의 옛 지명으로는 사기막골, 신둔, 제청안 등이 있으며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사기막골 :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 그릇을 구워 만들던 가마터가 있던 것이 마을 지명의 유례가 되었다. 창릉천의 풍부한 물과 북한산의 많은 나무로 땔감을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신둔 : 신둔(新屯)은 ‘새롭게 만들어진 군사 주둔지’란 의미가 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비상시에는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전쟁을 치르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또한 북한산성을 지키기 위한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던 큰 창고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둔마을 입구

▲제청안 : 조선시대 효자인 박태성과 그의 부친(父親) 박세걸의 무덤이 있고, 이 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청(祭廳)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박태성 정려비가 있는 제청안 마을 입구

(2) 지축동(紙杻洞)
지축동은 닥나무가 많은 마을에 이 나무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었던 지정동(紙亭洞)의 ‘지’자와 싸리나무가 많았던 축리(杻里)의 ‘축’자를 따서 지축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축동에 위치한 천년고찰 흥국사 입구

지축동의 자연촌락으로는 절골, 싸릿말, 지정동, 오부자골, 안진동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절골(사곡) : 이 마을에 흥국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절골마을 입구에 있는 비석

▲싸릿말 : 마을에 싸리나무가 많아 이것을 이용해 여러 특산물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싸릿말에 위치한 싸릿말교

▲지정(紙亭)동 : 이 마을에서 닥나무를 이용해서 종이(紙)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오부자골 : 이 곳에 유명한 다섯 명의 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진동(安進洞) : 새로 이주한 주민들이 편안하고, 안정되게 살자는 의미에서 안진동으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안진동은 공공주택지조성사업이 진행 중이다.

(3) 북한동(北漢洞)
이 곳을 북한동이라고 부른 이유는 마을에 북한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북한(北漢)이란 이름은 삼국시대 때부터 사용했던 명칭이다. 한강 이북지역을 예전에는 한산(漢山)이라고 불렀는데, 이 한산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북한산이 되었다고 한다.

북한동의 유례가 된 북한산

북한동의 옛 지명으로는 하창마을, 서문안, 훈국, 비석거리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하창마을 : 산 아래쪽에 있는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문안 : 북한산성의 여러 문들 중에서 서쪽에 있는 대서문 안쪽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서문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서문안 마을

▲훈창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이곳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주둔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즉, ‘훈련도감의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비석거리 : 이 일대에 수 십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4. 마을의 명소
(1) 박태성 효자비 및 묘

박태성 선생은 조선 말기의 효자로 품성이 온화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신도읍 효자리에 모시고, 매일같이 새벽 일찍 일어나 묘를 참배한 후 입궐하여 부모를 추모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을 하루같이 묘소를 참배했는데, 참배하는 길에 만난 호랑이도 그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한 듯 그를 등에 태워 모셨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빼어난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그의 행적을 기려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조선 고종 30년에 효자비를 세우고 포상하였다고 한다. 효자비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박태성 선생의 묘와 그의 부친묘가 위치해 있다.

박태성 선생의 묘는 3기의 봉분이 있는데, 좌우로 부인 선인 완산 이씨와 김해 김씨의 묘가 있다. 또한 봉분 옆에는 호랑이의 묘라 전해 내려오는 민무덤이 남아 있다.

제청안 마을 입구에 있는 박태성 효자비
박태성 묘는 효자비를 따라 약 300m 올라가면 된다.
세 갈래 길중 가운데 샛길로 올라간다.
약 20m 올라가면 박태성 묘 표지판이 나온다.
박태성 묘 앞에는 부친 박세걸 묘가 자리하고 있다.
박태성 묘는 호랑이 묘라 전해오는 민무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박태성 묘 좌우에 있는 부인 선인 완산 이씨와 김해 김씨의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5호
▲찾아가는 길 : △박태성 정려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로 522 인근) 박태성 묘 : 박태성 정려비를 지나서 300m 안쪽에 위치

(2) 북한산
북한산(北漢山)은 최고봉인 백운봉(백운대 836.5m)과 인수봉(810.5m), 만경대 (787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삼각산(三角山)으로도 불려왔다.

북한산이란 명칭은 과거에는 한강 북쪽 지역을 ‘한산(漢山)’이라고 불렀는데, 한산의 북쪽에 있는 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신라시대에 북한산 일대를 순행하고 세운 진흥왕순수비에도 북한산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 공원으로,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자원을 온전히 보전하고 쾌적한 탐방 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6.922㎢의 면적으로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또한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 그 속에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100여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 문화, 역사 학습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산 인수봉기암 <사진 = 북한산국립공원 _ 최창화 작품>
맑은날 북한산의 봄 <사진 = 북한산국립공원 _ 안충호 작품>
북한산의 조망 <사진 = 북한산국립공원_염철주 작품>

(3) 북한산성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 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인용 = 문화재청)

대동문 <사진 -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 남문 주변 <사진 = 문화재청>
북한산성 동장대 복원 후 모습 <사진 = 문화재청>
북한산성 대남문 <사진 = 북한산국립공원>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찾아가는 길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375(이외 서울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일원)

(4) 북한산성 행궁지
행궁은 유사시 왕의 행재소가 되는 곳으로 북한산성이 축성을 시작하기 한달 전인 숙종 37년 5월 25일에 당시 산성의 공사를 주관하던 감동당상인 김우항에 의해 건립이 처음 제기되었다. 동왕 5월 왕의 윤허를 얻어 8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위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공사에 큰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는 영건청을 두고 호조판서 김수항과 공조판서 이언강을 주관당상으로 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목재는 산성 밖의 삼천동에서 얻어서 지었는데 동왕 37년 10월 까지는 내전의 기와, 외전의 정초가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해 2월부터는 다시 내전의 창호·청판·토역 등의 수장공사와 외전의 입주상량 등 일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숙종 38년 5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행궁 규모는 내전이 좌·우 상방 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퇴 18칸을 합한 총 28칸이었다. 이 정전 외에 또 좌·우각방·청·대문·수라소 등의 부속건물이 35칸이나 되었다. 외전 역시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 내행각방 12칸을 위시한 루(樓)·청·고간(庫間)·대문 등 총 33칸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그 후 일제 시대까지 그 건물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언제 지금과 같은 모습의 터만 남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행히 일제 시대에 찍힌 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이며 단국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동 행궁지는 경기도 기념물 제160호(1996.07.22)로 지정되었다가 사적 제479호(2007.06.08)로 변경 지정되었다. (인용 = 고양시 문화관광)

북한지에 수록된 행궁지 위치도 <자료 = 문화재청>
1904년 행궁 사진 <사진 = 문화재청>
발굴된 행궁지 <사진 = 고양역사이야기>

▲지정번호 : 사적 제479호
▲찾아가는 길 : 덕양구 북한동 169번지

(5) 황치신 묘 및 신도비
황치신 선생은 조선조의 명재상 영의정 황희의 장남으로 태종초에 벼슬길을 시작하여 세조, 성종대까지 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감찰과 호조좌랑을 비롯하여 동부승지, 항성부윤, 중추원사, 충청도병마절도사, 찬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다. 묘는 정경부인 황씨와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있다.

황치신 신도비 모습
정경부인 황씨와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있는 황치신 묘
황치신 묘에서 바라 본 마을의 모습

(6) 산영루
산영루는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2014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초석만 10개 남아있던 것을 전문가들의 역사적 고증과 자문을 거쳐 38.41㎡ 규모의 ‘고무래 정(丁)’자 형태로 옛 모습 그대로 살려 복원되었다.

복원전 산영루 <사진 = 고양역사이야기>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복원된 산영루 <사진 = 고양역사이야기>
산영루에 있는 다산 정약용 시조 <사진 = 고양역사이야기>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197-20

(7) 흥국사
흥국사의 창건 연대는 신라 661년 (신라 문무왕 원년)에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산을 내려와 이 곳에 이르게 되었고, 서기를 발하고 있는 석조 약사여래(藥師如來)부처님을 보신 원효대사가 인연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전(本殿)에 약사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며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하고 오늘의 흥국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이후 사찰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한 자취는 알 수 없으나 서기 1686년(조선 숙종 12년)에 중창한 사실과 영조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 여러 스님들이 중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인용 = 흥국사 홈페이지)

흥국사 전경
흥국사 나한전 (향토문화제 제34호)
흥국사 약사전 <문화재자료 제57호>
흥국사 나한전과 약사전 전경
흥국사에 있는 상수리나무 <보호수. 경기-고양-30>

▲지정번호 : △흥국사 대방(등록문화재 제592호) △흥국사 영산회상도(유형문화재 제296호) △한미산 흥국사 괘불(유형문화제 제189호) △한미산 흥국사 극락구품도(유형문화재 제143호) △흥국사 나한전(향토문화재 제34호) △흥국사 약사전(문화재자료 제57호)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104호) △흥국사(불교조계종 제38호) △상수리나무 보호수(경기-고양-30)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흥국사길 82

5. 현대의 효자동

북한산 백운대에서 바라 본 모습 <사진 = 북한산국립공원>
고양지축공공주택지조성사업이 진행 중인 효자동

고양시 전체 면적의 9.4%에 해당하는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효자동은 효자 박태성의 아름다운 효행 이야기가 마을 이름이 되었다. 또한 북한동 전체와 효자동 일부가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2015년 본격적인 택지개발이 시작되었고, 2018년 마무리되면 서울, 양주, 의정부 등을 잇는 사통팔달의 교통망으로 더욱 발전하는 마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경관 그리고 공공주택지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고양시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발전하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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