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열다섯 번째】

XⅤ. 흥도동(興道洞)

흥도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동남쪽 방향에 있으며, 덕양구에서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행정동으로 법정동으로는 원흥동, 도내동 그리고 성사동 일부를 관할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창릉천이 흐르고 퇴적평야가 폭넓게 발달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택지개발이 진행 중에 있다.

덕양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흥도동

1. 흥도동 현황
▲행정동 : 흥도동
▲법정동 : 원흥동, 도내동, 성사동 일부
▲인구 : 33,864명(13,550세대) / 28통159반 (2017년 8월 말 기준)
▲면적 : 11.32㎢
▲주민센터 : 경기도 덕양구 흥도로 454번길 44

2. 마을의 변천사
▲원흥동
고양군 원당면 목희리 >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 > 고양군 원당읍 원흥리 >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도내동
고양군 원당면 도내동리 > 고양군 원당면 도내리 > 고양군 원당읍 도내리 >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흥도동주민센터전경
증축중인흥도동주민센터(2017년10월완공예정)3.마을지명유래(1)흥도동(興道洞)흥도동명칭은원흥동의'흥(興)'자와도내동의'도(道)'자를따서붙여진행정동이름이다.참고로흥도라는명칭은흥도초등학교를건립하면서이름을'흥도(興道)'라고붙이면서사용하게되었다고한다.
흥도(興道)라는 명칭은 관내 초등학교를 건립하면서 '흥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용하게 되었다.

(2) 원흥동(元興洞)
원흥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동남쪽 방향에 있는 마을로 본래 이름은 목희리(木稀里)였다. 목희리의 유래는 이 마을에 청자를 굽던 도요지가 있었는데, 땔감으로 나무를 많이 베어 근처에 나무가 드물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이후 일제시대 때 '원당지역을 크게 발전시킨다는 뜻'으로 원흥(元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흥동에 위치한 고양시농업기술센터

원흥동의 자연촌락으로는 목희리, 가시골, 솔개마을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목희리(나무드머리) : '나무가 드문 마을(木稀)'이라는 뜻으로 청자를 굽기 위한 가마터가 있던 마을이다. 땔감으로 나무를 많이 베어 마을 주변에 나무가 드물었다고 한데서 유례가 된 지명이다.

나무가 드문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목희리

▲가시골 : 마을에 가시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으로 서삼릉 외곽마을로 예전에 왕릉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근처에 가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왕릉으로 가는 길목에 가시나무를 많이 심었던 가시골은 현재 택지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다.

▲솔개마을 :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을 지닌 마을이다.

소나무가 많았던 솔개마을의 현재 모습

(3)도내동(道乃洞)
이 곳을 도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신의 선생이 이 마을에서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적들보다 아군의 수가 부족했다고 한다. 이에 이신의 선생은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창릉천 옆의 도라산을 며칠 동안 돌았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마을 이름을 '도래울'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도내동'이 됐다고 한다.

석탄 이신의 장군을 기리기 위한 장대비각과 의장대

도내동의 옛 지명으로는 석탄촌, 서촌, 은못이, 서재동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석탄촌(石灘村) : 이신의 선생의 호인 석탄을 딴 마을로 선생이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신의 선생과 의병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현판

▲서촌 :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은못이 : 단종의 충신이었던 이축 선생이 세조가 많은 신하를 죽이고, 왕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연못을 파고 은둔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재동 : 조선조 때 성재 민승아 선생이 서실(書室)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4. 마을의 명소
(1) 신라말 고려초기 청자요

덕양구 흥도동 원흥동에 위치한 가마터는 1937년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조선의 문화유적을 조사하면서 일본인 도자사학자인 야수건에 의해 학계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대 본격적인 조사에 의해 우리나라 초기 가마터 중 대표적인 청자요로 밝혀졌다.
중국 당나라 시대 월주요 청자와의 관련으로 신라말, 고려초기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서해안, 남해안 일대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이중 원흥동 가마터는 인근 경기도 용인 서리 가마터 등과 함께 대규모의 퇴적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가마터는 건지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전체 유적의 면적이 3,300㎡에 달하며,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이곳 원흥동 청자요 유적에서는 12세기 이전의 청자기와가 최초로 발견되는 등 우리나라 초기 도자사(陶瓷史)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 초기 도자사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청자요
신라말 고려초기 청자요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4호
▲찾아가는 길 : 고양시 덕양구 고양대로 1670번길 108-6 (해당 주소지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지 말고,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이 보인다.)

(2) 심희수 선생 교지 및 묘
심희수 선생(1548~162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정자(正字) 건(鍵)의 아들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이고, 이연경(李延慶)의 외손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도승지,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주 노씨(光州 吳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정경부인 광주 노씨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측면에서 바라 본 심희수 선생 묘
심희수 선생 묘 상단에는 부친 심건의 묘가 있다.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7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06-1

(3) 석탄 이신의 선생 장대비(將臺碑)
고양 지역의 대표적 의병장 이신의 선생을 기리는 장대비는 1740년(영조16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49년 만에 윤식(尹植), 장해익(張海翼)과 도래울 마을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비의 앞면에는 ‘이석탄장대(李石灘將臺)’, 뒷면에는 ‘선생임진기의병설대 후백사십구년경신동인립(先生壬辰起義兵設臺 後百四十九年庚申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신의선생이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장대를 선단한 후 149년이 되는 경신년에 마을사람들이 세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후 고양지역 사람들은 이 비를 장대비라 불러왔다.
비가 세워진 후에는 일제 감점기에 장대비 가치를 폄하하여 일본인이 받은 재앙이야기, 장대비 유실에 의한 재앙이야기 등 장대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장대비(將臺碑)는 흥도초등학교 옆, 도래울의장대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석탄 이신의 선생 장대비각 전경
장대비 앞면에는 ‘이석탄장대(李石灘將臺)’로 기록되어 있다.
장대비 옆에 있는 이신의 장군이 왜적과 싸움을 대비할 지휘소였던 의장대 전경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9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의장로 45-1 (도래울의장대공원 내 위치)

(4) 이축 선생 묘 및 은지
이축 선생(1402~1473)은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목은 이색의 둘째 아들 인제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정랑,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후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고, 김종서 등이 유폐되어 있는 영월을 향해 매일 망배하고 그의 처소에도 망월당이라는 옥호를 달아 놓을 정도로 전왕에 대한 충절이 깊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축은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연못을 하나 팠는데 그 연못의 이름을 ‘숨을 은(隱)’자, ‘못 지(池)’자를 써서 ‘은못이(隱池)’라고 하였고, 이 마을의 명칭이 유래됐다고 한다. <인용 : 고양시 티스토리>

해당 주소지 옆으로 이축 선생 묘로 올라가는 샛길이 나온다.
샛길을 따라서 30여 미터 올라가면 된다.
이축 선생 묘 전경
묘 인근에 있는 이축 선생이 팠던 은지(연못)는 가는 길이 잠겨 있었다.
은지(隱池) 또는 ‘은못이'이라 불렀던 연못은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 <사진 = 고양시 티스토리>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6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내동 837-3 (길과 주택 사이에 있는 샛길로 올라가면 묘역이 보인다.)

(5) 이유청 선생 묘
이유청 선생(1459~1531)은 좌리공신이며 청백리로 녹훈된 이훈(李塤)의 아들로 태어나 1486년(성종1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김종직의 부관참시를 반대했다가 삭주에 유배된 후 3년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다시 연루되어 장(杖) 100대를 받고, 직첩(관리로 임명된 자에게 수여한 증서)이 환수되었으며, 관노(官奴)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재등용되어 사헌부 집의로 복직되었고, 중종 2년(1507) 정란공신 2등에 올라 우부승지,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중종 3년(1508) 공신에 오르지 못한 신복의(辛腹義)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에 유배되었다. 1510년 방환되었다가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1513년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1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중종 14년(1519) 중종의 뜻에 따라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을 숙청하고, 우의정에 승진한 뒤에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1521년 명나라 세종이 즉위하자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23년 좌의정에 승진하여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했다. 1528년 영중추원사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묘는 한산이씨 묘역에 위치하며 정경부인 경주 이씨의 묘와 합장되어있다.

이유청 선생 묘 전경
정경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묘로 되어 있다.

▲지정번호 : 사적  제54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내동 837-3 (이축 선생 묘 위쪽에 위치한다.)

(6) 느티나무(보호수)
원흥동에 위치한 이 나무는 본래 두 그루였는데, 밑둥에서 합쳐져 한 그루인 듯 보이다가 땅 위 2m 지점에서 다시 가지가 2개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농사일 하는 주민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선물해주는 느티나무
밑둥에서 합쳐져 한 그루인 듯 보이다가 2m 지점에서 다시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지정번호 : 경기-고양-29
▲수령 : 약 155년 ▲수고 : 15m ▲나무둘레 : 2.4m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204-2

5. 현대의 흥도동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흥도동은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아파트, 상가 등 현대 건물이 많아지고 있다.

고양시 전체 면적의 4.23%에 해당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흥도동은 지방도 310호선, 69호선, 55호선을 통하여 구파발, 화전, 수색으로 연결되며, 고양시내 10개 동과 연접되어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고양시의 여러 마을 중에서 비교적 옛 풍습이나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 2000년대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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