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두 번째】

Ⅱ. 관산동(官山洞) 
관산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있는 행정동으로 마을에 통일로가 지나고, 남서쪽으로는 고양 지역의 젖줄인 공릉천이 흐르는 곳이다. 법정동으로는 관산동, 내유동, 그리고 고양동과의 사이에 있는 대자동 일부를 관할하고 있다. 

관산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 관산동 현황 
▲행정동 : 관산동 
▲법정동 : 관산동, 내유동, 대자동 일부 / 43통 200반
▲인구 : 35,294명 (2017년 4월 30일 기준)
▲면적 : 15.05㎢ 
▲주민센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통일로 789
 

2. 마을의 변천사
▲관산동
고양군 사리대면 관산리 > 1914년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1992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내유동
고양군 사리대면 내산리 > 1914년 고양군 벽제면 내유리 > 1992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대자동
고양군 사리대면 대자리 > 1914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 1992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관산동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관산동(官山洞)

관산동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오래된 지명이다. 조선 영조년에 발간된 고양군지에도 '관산(館山)'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당시의 표기에는 ‘객사 관(館)’자를 써서 기록하였다. 

‘관(館)’자를 사용한 유래는 이곳에 고양군청과 외지에서 온 관원들이 머물던 객관이 있던 곳이라 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벼슬 ‘관(官)’자로 바뀌게 되었고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고양군지는 1755년에 당시 군수 이석희(郡守 李錫禧)가 편찬한 고양군읍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중이다.

관산동의 자연촌락으로는 안말, 넘말, 시묘골, 심천, 두포동, 벌판마을, 주막거리, 고골 등이 있다. 자연촌락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안말 : 마을이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넘말 : 산 너머에 있는 마을 ▲시묘골 : 청주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의 묘가 있는데, 그 아들이 3년 동안 묘를 떠나지 않고 지키자 그 효심을 기려 붙인 이름 ▲심천 : 관산동을 대표하는 자연촌락으로 마을 앞 공릉천 물이 유달리 푸르러서 붙여진 이름 ▲두포동 : 하천제방을 막아서 만든 마을을 만들어 마근개라고도 불리움 ▲벌판마을 : 마을에 벌판이 있어 붙여진 이름 ▲주막거리 : 주막이 있던 마을 ▲고골 : 옛골 또는 오래된 골이란 뜻으로 군청이 있던 오래된 골짜기 마을이란 뜻

두포동(마근개) 마을 입구

(2) 내유동(柰遊洞) 
내유라는 지명은 마을의 자연촌락인 내산(柰山)과 유산(遊山)의 두 마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지었다는 유래가 있다. 내산의 ‘내(柰)’자로 미루어 이 곳에는 능금이 많이 열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영조 때 발간된 고양군지 등의 기록에는 내산리(柰山里)로 내동촌(內洞村)과 계기동(鷄基洞) 마을에 총 102호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뤄볼 때 당시 내유동은 집 호수가 상당히 많아 인근 마을에 비해 큰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이 지역을 ‘놀미’라고도 하는데, 놀미는 ‘놀 유(遊)’자와 ‘뫼 산(山)’을 합한 놀뫼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내유동의 자연촌락으로는 내산촌, 유산촌, 여못이, 명묘골(명막골) 등이 있다. 내유동 자연촌락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내산촌 : 오래 전부터 마을에 능금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움 ▲유산촌 :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수려해 놀기 좋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여못이 : 태못이라는 연못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 ▲명묘골 : 유명한 분이 묻힌 묘가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조선시대 도감찰사를 지낸 유명한 인물이 묻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3) 대자동(大慈洞) 
대자동은 고양동과 관산동이 관할하는 행정동이다. 『고양동 마을이야기』에 '대자동의 마을 유례'를 알 수 있다. 

아파트와 한옥건물이 어울어져 있는 시묘동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4. 마을의 명소 
(1) 최영장군묘 

최영장군 사당에 있는 초상화

최영장군(1316년-1388년)은 고려말기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고려 공민왕 1년(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으로 특히 공민왕 5년에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되찾았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지 못하고,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1388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어 아버지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했다. 최영은 충신이자 명장이면서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어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주차장에 내리면 최영장군묘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650m 정도 올라가면 된다.
최영장군묘소 입구로에는 최영장군 일대기에 관해 적혀 있다.
앞에는 최영장군묘가 뒤에는 부친 최원직의 묘가 있다. 1388년 처형된 후 부친 최원직의 묘소에 안장되었다.
최영장군묘 왼쪽에는 방문객들이 다녀가면서 최영장군에게 소원을 빌며 쌓은 돌탑이 있다.

▲ 경기도기념물 제23호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2) 성령대군묘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로서 양령, 효령, 충령(세종대왕) 대군의 친동생이다. 1414년(태종 14)에 대군이 되었으며 대광보국 숭록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성령대군은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이를 매우 비통해하며 친히 제문을 짓고, 분묘 옆에 암자를 지어 대자암이라고 하고 대군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자암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다. 성령대군묘는 대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장대석 3단을 쌓았으며 주위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대자사
대자사 왼편으로 성령대군묘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언덕 중턱에 원천군과 부인묘가 있으며, 성령대군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성령대군은 14세에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성령대군묘에서 바라 본 원천군과 부인묘

▲ 고양시 향토유적 제2호(1986년 6월 16일 지정)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9-1

(3) 필리핀군 참전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필리핀군은 1950년 9월 19일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496명의 병력이 전투에 참여하여 왜관, 김천, 대구, 임진강변, 철원지구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6.25전쟁 참전으로 필리핀군 92명이 사망하였고, 229명의 부상자, 57명의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산화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에게 그 뜻을 전하기 위해 1974년 10월 2일 참전비를 세우게 되었다.

6.25에 참전한 필리핀군 영령을 기리기 위한 필리핀군 참전비

▲ 기단 높이(4.5m), 비 높이(17m), 동상 높이(3m)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154-10

필리핀군 참전비 옆에는 '고양시 6.25참전 기념비'가 있다

(4) 공릉천
공릉천은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꾀꼬리봉 남쪽에서 발원하여 장흥계곡, 송추유원지, 일영유원지를 지나 남서쪽으로 흐른다 고양에서는 덕양구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일산동구 사리현동, 파주시 조리읍·금촌동·교하읍을 통과하여 파주시 교하읍 송촌리 북쪽에서 한강 본류로 흘러 간다. 고양시에서 공릉천에 합류되는 지류에는 덕양구 선유동에서 발원하는 선유천, 덕양구 오금동에서 발원하는 오금천, 벽제동에서 발원하는 벽제천, 대자동에서 발원하는 대자천, 원당동에서 발원하는 원당천, 옛 백제읍 지영리에서 발원하는 장진천 등이 있다.

해동지도 <자료 = 문화재청>

『해동지도』에는 공릉천(恭陵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보신천(寶信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릉천의 유래는 예종의 조선 제8대 임금 예종(睿宗)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인 ‘공릉’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구부러진 하천의 모양을 보고 곡릉천(曲陵川)으로 바꿔 불렀다가 경기도 파주시에서 중앙하천관리위원회에 하천의 명칭을 바로잡기 위해 심의를 요청하였고, 2009년 1월 1일부터 공릉천으로 원래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고양시 최대 규모의 하천으로 깊은내 또는 심천(深川)이라고도 불렀으며, 공릉천 물이 유달리 푸르고, 수심이 깊어 붙여진 이름이다.

관산동에서는 공릉천을 수심이 깊고 푸르다는 의미로 심천(深川)이라고 불렀다.
공릉천에서 노닐다가 쉬고 있는 자라 한 마리

(5) 테마동물원 쥬쥬
2002년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국내 유일한 민간 동물박물관(제 252호)으로서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파충류 특화 동물원에서 출발, 현재 150여 종의 다양한 동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생태공원이다.

테마동물원 쥬쥬 입구
야간에 하늘에서 본 쥬쥬 모습 <사진 = 테마동물원 쥬쥬>

5. 현대의 관산동

꿈과 희망이 있는 관산동 마을

현대의 관산동은 관산동주민센터가 있는 중심마을로 농촌마을과 빌라, 저층 아파트지역, 15층 이상 고층아파트 지역 등 도시마을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논과 밭, 창고와 산 등이 어울어져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대자동과 뒤편에 명봉산을 두고 공릉천 방향으로 넓은 퇴적 평야가 발달되어 있는 내유동 마을이 어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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