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열한 번째】

XI. 행주동(幸州洞)

행주동은 임진왜란 3대 대첩지(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 중 한 곳인 행주산성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시, 김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법정동으로 행주내동, 행주외동 및 토당동 일부를 관할하고 있으며 마을 뒤쪽에는 덕양산이 있고,  앞쪽으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시, 김포시와 마주하고 있는 행주동

1. 행주동 현황
▲행정동 : 행주동
▲법정동 : 행주내동, 행주외동, 토당동 일부 / 29통 187반
▲면적 : 7.74㎢
▲인구 : 21,555명 / 10,467세대
▲주민센터 : 경기도 덕양구 지도로14번길 11

2. 마을의 변천사
▲행주내동
고양군 구지도면 내성동리 >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 고양군 지도읍 행주내리 >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
▲행신외동
고양군 구지도면 외성동리 >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 고양군 지도읍 행주내리 >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
▲토당동 관련 내용 : '고양시 마을 이야기 세 번 _ 능곡동 마을이야기' 참고

행주동 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행주동(幸州洞)

행주동은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지명이다. 원래는 살구나무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고 해서 '살구 행(杏)'자를 써서 '행(杏)주리'라 부르다가 행주대첩 이후 왕이 다녀간 뒤 임금이 행차한 마을이 되면서 그 표기가 '행(幸)'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 예로 행주서원은 '살구 행(杏)'자와 '물가 주(洲)'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살구나무가 많은 강변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위에서 바라 본 행주산성 정상 <사진 = 문화재청>

(2) 행주내동(幸州內洞)
행주내동은 행주산성에 가까운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고양군지'에 따르면 본래 고양군 구지도면 내성동리 마을로 총 42호(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주내동의 자연촌락으로는 맨돌, 잣골, 장세이 등이 있으며, 지역을 부르는 망곡재 고개 등이 있다.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맨돌 : 한자명으로 결석(結石)이라고도 불리는 맨돌 마을의 지명유례는 세 가지가 전해져 내려온다. 첫 번째는 마을이 돌이 많은 지역으로, 실제 행주대첩 때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외적을 물리친 돌이 이 마을에서 조달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한강제방이 쌓이기 전까지 배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배가 정박하면서 묶어두던 커다란 돌로 인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마을이 한강 가까운 곳에 위치해 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올 때가 있는데, 물이 빠지면서 남아있던 뻘들이 돌과 같이 굳어졌다고 해서 한문으로 결석(結石)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마을에 돌이 많아서 이름 붙여진 맨돌마을

▲잣골 : 잣골은 성곽을 나타내는 성(城)'자를 사용해서 '잿골'로 부르다가 잣골이 됐다고 한다. 즉, '산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장세이 : 예전에 이 마을에 장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망곡재 고개 : 이곳을 망곡재 고개라 부른 이유는 고려시대부터 이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었는데, 국상(國喪)이 나면 주민들이 이 고개로 올라와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2) 행주외동(幸州外洞)
행주산성에서 봤을 때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고양군지'에 따르면 당시 총 79호(戶)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양시에서 유명한 어촌마을로 주민들은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자연촌락으로는 서원촌, 소애촌, 행화촌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음식문화거리가 형성되 있는 행주외동

▲서원촌 : 이 마을 인근에 권율장군과 전투에 참여했던 제장들을 모시는 행주서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촌마을 이름의 유례가 된 행주서원

▲소애촌 : 한강 바로 옆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1911년 조선지리지 자료에 소애(小涯)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물가 애(涯)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대표적인 어촌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강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행주나루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업에 종사했던 마을이다.

한강 옆에 있는 소애촌은 고양시의 대표적인 어촌마을이었다.
한 음식점 주차장 입구에 남아있는 행주나루터 표식

▲행화촌(杏花村) : 이 마을 일대에 살구나무가 많이 있어 봄이 되면 살구꽃이 만발하게 피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4. 마을의 명소
(1) 행주산성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봉우리들을 둘러쌓아 성을 축조한 것으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7~8부 능선을 거의 수평으로 하여 둘러싼 형태이며 초기 소규모의 산성이 주류를 이룬다.) 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이다.
덕양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로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고 있는 형태는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같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북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확인할 수 없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와 회청색 경질토기 등의 조각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 수지문(手指文)이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 장군이 대승을 이룬 전적지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룬 곳이다. 현재 성안에는 복원된 415m의 토성의 성곽과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구축하였다. <고양시 행주산성 역사문화 인용>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대첩문
권율장군 동상
행주대첩비와 대첩비각
대첩비각 전경
행주대첩비 전경
덕양정 전경
진강정 전경 <사진 = 문화재청>
충장사 내부 모습 <사진 = 문화재청>
행주대첩도 <사진 = 문화재청>

▲건립시기 : 삼국시대 (행주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성의 축성기법이 삼국시대 양식으로 1992년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삼국시대의 와당 및 토기 파편 등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군사전략상 요새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축성연대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크기 : 둘레 약 1,000m (현존 415m)
▲규모(면적) : 산성 면적 347,670㎡(105,17평)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56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5번길 89 덕양산 내

(2)행주서원
권율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권율(1537∼1599) 장군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장이다. 특히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전투에서는 1만 명 미만의 군사로 3만의 왜군을 무찔렀다. 이 서원은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건물이 없자 헌종 8년(1842)에 왕의 명령으로 세웠다.
서원에는 현재 강당만 남아 있는데, 앞면 5칸·옆면 1칸 반 규모이다. 서원 안에 있던 행주대첩비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1970년 행주산성 내에 새로 지은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옆으로 옮겨 놓았다. <문화재청 인용>

정면에서 바라 본 행주서원
행주서원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행주서원 내부 모습.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어 담 너머로 촬영을 했다.

▲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
▲찾아가는 길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 127-17 (행주외동)

(3) 행주성당
1910년에 지어진 한옥성당으로 1928년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상량 목부재를 포함하여 당시 사용하였던 기초 부재를 대부분 재활용하였다. 1949년 증축하면서 기록한 상량 묵서도 남아있어 변천과정 기록유지가 잘 되어 있다. 건물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는 등 역사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성당이다.

행주성당 입구 모습

 

1910년에 한옥성당으로 처음 지어진 행주성당은 건물의 노후화에 따라 2015년 옛모습을 반영하여 보수하였다.
행주성당 입구에 그려진 벽화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455호
▲찾아가는 길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144번길 50

(4) 고양 행주산성 역사공원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고양시정연수원 앞 한강 변에 위치하고 있다. 2015년 8월부터 사업비 10억원을 들여 3만 3천㎡의 넓은 한강수변에 조성되었으며, 2016년 4월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조선 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를 토대로 행주마을의 옛 모습을 재현해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공원에는 행호관어도 그림에 보이는 빨랫돌 머리, 버드나무류, 한강을 오가며 행주웅어를 잡던 고기잡이배 등 최대한 사실적으로 복원하여 과거 행주마을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생태광장에는 행주를 상징하는 살구나무를 심고 갈대, 수크령, 털부처꽃 등 자생식물을 식재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울리는 광장으로 인근 행주산성, 행주서원 등 역사적인 장소와 연계해 역사생태 학습장으로 활용되며, 남북 분단과 갈등의 상징인 군 초소를 정비해 한강과 철새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바꾸고 잔디광장, 친수스탠드를 배치하여 시민들이 한강을 조망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이다. <고양시청 보도자료 인용>

고양 행주산성 역사공원 안내도

 

군 철책 철거를 하면서 크고 작은 돌들이 많이 나와 돌탑을 쌓아 보전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행주마을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 '빨랫돌머리'라고 이름 붙여졌다.
행주 양수장 초입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가순공 관계송덕비
겸재 정선이 행주지역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하면서 그렸던 '행호관어도'에 나오는 배를 재현한 고기잡이배
무장공비 침입에 대비하여 일반인 접근을 통제해오다 2012년 4월 19일 한강변 군철책 일부를 철거해낸 '한강하구 군철책 철거 기념지'이다.
고양 8현의 한 분인 석탄 이신의 선생(2012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 기념비

5. 현대의 행주동

한강과 행주대교
행주동 음식문화거리
행주대첩비 야경 <사진 = 문화재청>

행주동은 다른 지역에서 고양시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되는 자유로, 방화대교, 행주대교가 있어 교통이 편리한 마을로 지도로를 중심으로 상가가 밀집되어 있고, 고층의 아파트부터 저층의 빌라, 단독주택, 행주동 먹거리촌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또한 역사적 문화유적지인 행주산성은 물론 조선시대에는 수려한  한강변에 수 많은 정자가 있었던 마을로 전통과 현대 문물이 조화롭게 발전하는 마을이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