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여덟 번째】

Ⅷ. 주교동(舟橋洞)

주교동은 고양시청이 있는 마을로 행정, 교통, 지리적으로 고양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곳이다. 마을의 중심에 고양시청과 시의회가 자리하고 있으며 고양대로, 호국로, 서울 교외선과 외곽순환도로가 지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현재는 농촌마을과 더불어 고층 아파트, 빌라 단지와 상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양시 중심마을인 주교동

1. 주교동 현황
▲행정동ㆍ법정동 : 주교동 / 27통 230반
▲인구 : 17,589명 /  7,712세대 (2016년 12월 31일 기준)
▲주민센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대로 1315번길 71
 

2. 마을의 변천사
▲고양군 원당면 이패리 > 고양군 원당면 주교리 > 고양군 원당읍 주교리 >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주교동 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주교동
주교동은 한자로 '배 주(舟)'자와 '다리 교(橋)'자를 사용한다. 한강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마을 앞에 한강으로 이어지는 샛강이 있었는데, 홍수 때 물이 불어나면 주민들이 건너 편 마을인 성사동으로 가기 힘들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배를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주교' 또는 '배다리'라고 불렀다. 
조선 영조 이전부터 사용된 지명으로 고양군지에 이패리 마을에 ‘주교촌(舟橋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를 이용해 다리를 놓으면서 주교동으로 불려졌다.

주교동의 자연촌락에는 넘말, 박재궁, 마상골, 독곶이, 능골 등이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넘말 :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재궁(朴齎宮) : 박재궁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불려진 오래된 이름이다. 이 지역의 밀양 박씨 가문과 연관이 있으며, 밀양 박씨 재실이 궁과 같이 크고 유명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박재궁의 유래가 된 밀양 박씨 재실

▲마상골 : 마상골이라 불리는 이유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마씨 성을 가진 주민들이 많이 거주했고, 이들이 사는 마을 위쪽이라는 의미로 '마상(馬上)'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두 번째는 마을의 생김새가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1911년 발간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원당면 주교리에 마상곡(馬上谷)'이라는 골짜기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마상골은 빌라, 상가, 아파트 등이 들어서고 있다.

▲독곶이 : 독곶이라고 부르게 된 유례는 이 지역이 대장리 방향으로 땅이 쑥 튀어나온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이 마을에 한강물이 들어오곤 했는데, 이때 들어온 한강물에 독(獨)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독곶이 마을 입구에 있는 비석은 지형을 형상화했다.

▲능골 : 능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을에 있는 밀양 박씨 묘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마을에는 고양시 향토문화재인 박충원 선생 묘를 비롯해서 고려조 상장군을 지냈거나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인물의 무덤이 있으며, 그 규모가 매우 크다.  밀양 박씨 묘역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마치 임금의 능과 같이 크다고 여겼고, 무덤 자리가 있는 인근 골짜기를 능골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례가 됐다.

능골마을에는 밀양 박씨와 관련된 한옥과 빌라 등의 주택단지가 어울어져 있다.

4. 마을의 명소
(1) 병풍바위(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

병풍바위와 관련해서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병풍바위 인근에 큰 세력을 가진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문중에서는 병풍바위의 정기로 가문의 영광이 이어진다고 믿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부잣집의 하인이 주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고, 그 하인의 아들은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면서 도망을 갔다. 열심히 풍수지리를 익혀 명지관이 되서 돌아온 하인의 아들은 부잣집의 기운이 병풍바위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위를 깨뜨리기로 결심하고,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자 큰 굉음과 함께 천둥 번개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이후 부잣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면서 세력은 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병풍바위를 깨뜨린 하인의 아들 명지관도 서오릉 능을 자리잡은 후 벌에게 쏘여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해당 주소지 오른쪽으로 병풍바위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입구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가면 된다.
150여m 올라가면 병풍바위와 안내판이 보인다.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원당로 181번길 83 (맞은편에 올라가는 길이 있다.)

(2) 박충원 선생 묘 및 신도비
박충원 선생(1507~1581)은 문신으로 자는 중초이며 호는 낙촌, 본관은 밀양이다. 고양팔현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중종 26년(1531)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그 후 교리를 거쳐 영월군수, 춘추관 편수관, 성천부사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45년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내고 명종 8년(1553)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종 21년(1566)에 이황의 뒤를 이어 양관의 대제학을 지냈으며, 탄핵으로 이조 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다시 이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밀원군에 봉해졌다. 

선조 5년(1570) 세자 좌빈객과 우빈객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공이며 저서로는 '낙촌박선생유고' 등이 있다. 특히 영월군수로 재직 당시 단종의 현신과 화답하고, 단종의 묘역을 장릉으로 천장하였다.

박충원 선생 묘는 주교동 밀양 박씨 묘역 내에 위치하며 묘소에는 묘표, 상석, 장명등 및 동자석과 문인석 각 한쌍이 있다. 박충원 선생 묘는 정경부인 성산 이씨(星山 李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고양시청 티스토리 참고>

밀양 박씨 묘역 입구
묘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문 밖에서 촬영한 밀양 박씨 묘역
박충원 선생 묘 <사진 = 고양시청 티스토리>
박충원 선생 묘는 성산 이씨(星山 李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사진 = 고양시청 티스토리>
밀양 박씨 묘역 옆에 있는 신도비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26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원당로 141번길 43 (맞은편)

(3) 이무 선생 묘 및 신도비
이무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돈부(敦夫), 호(號)는 중정(中亭)이다.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판서 거경(居敬)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우왕(禑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있으면서 유배가 있던 조영길이 도망한 것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아 파직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일파라하여 곡주에 유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1390년 전라도 도절제사로 왜구를 격멸할 때 무려 70여 급이나 참하여 논공행상 시 왕으로부터 의주(衣酒)를 하사받았으며, 그 공적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그의 주둔지였던 주계(朱溪)를 그의 이름 중 ‘무(茂)’자를 따서 개칭하였는데, 오늘날 무주군(茂州郡)이 바로 그곳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太祖) 2년(1393) 개성윤(開城尹)을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서강 및 강화도의 병선(兵船)을 점검하는 등 국방문제에 주력하였다. 태조 5년(1396)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의 왜구를 토벌하였다. 2년 뒤 제1차 왕자의 난때는 참찬문하부사(參贊門河府事)로 있으면서 방원(蒡遠)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그 후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를 거쳐 좌명공신(佐命功臣) 등으로 우정승(右政丞)에 승진, 이어 영승추부사(領丞樞府事), 우정승 겸 판병조판사(右政丞兼判兵曹判事)를 역임하였다. 

태종 8년(1408)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민무구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에 유배되었다가 죽주로 이배(移配) 도중 괴한들에 의하여 피살을 당했다.

이분의 또 다른 업적이 있는데, 김사형(金士衡), 이회(李薈)와 함께 지리적 지식을 수집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세계 최초로 제작된 세계지도라는 큰 의미가 있다. 묘는 해평 윤씨(海平 尹氏)∙능성 구씨(綾城具氏)와 합장되었다.
<고양시청 티스토리 참고>

이무 선생 영모비
이무 선생과 관련된 설명을 해주시는 22대 종손 이민호 총무님
이무 선생 사당 전경
이무 선생 묘는 해평 윤씨ㆍ능성 구씨와 합장되었다.
주교동 주민센터 입구에는 이무선생이 김사형, 이회 등과 함께 그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규장각에는 일본 류코쿠대 도서관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필사본을 필사한 자료가 있다. <자료 = 서울대 규장각>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9호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75

(4) 보호수 느티나무 2본
주교동에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잎이 피는 것을 보고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상했다고 한다. 2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데, 모두 구멍이 있었으나 보존 처리하는 상태이며 가을에는 황금 들판과 함께 단풍이 아름답다고 한다.

2층 주택 사잇길로 올라가면 느티나무가 나온다.
잎이 피는 것을 보고 풍흉을 예상했던 주교동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번호 : 경기-고양-28
▲수령 : 155년 / 높이 : 18m / 나무둘레 : 2.4m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마상로57번길 47 (사잇길로 올라가면 된다.)

5. 현대의 주교동
 

고양시청이 있는 고양시 중심마을인 주교동

주교동은 고양시청이 있는 고양시의 중심마을이다. 고양시의 행정, 교통, 지리적으로 중심마을에 맞게 여러 기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20층 이상의 아파트, 상가, 빌라 등의 현대식 건물과 윗배다리, 독곶이마을, 영글이마을 일대에는 농촌마을의 모습이 남아 있다. 또한 시청 주변의 여러 도로를 통해 서울, 능곡, 일산, 파주 등을 쉽게 왕래할 수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마을이다. 도시개발이 계속해서 진행되면 인구 증가와 함께 주거환경이 더욱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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