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마을 이야기 세 번째】

Ⅲ. 능곡동(陵谷洞)

능곡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남서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행정동으로 동쪽으로는 행주동이, 서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김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법정동으로는 토당동, 신평동, 대장동, 내곡동을 관할하고 있다.

능곡동은 고양시 중심에서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 능곡동 현황 
▲행정동 : 능곡동
▲법정동 : 토당동, 신평동, 대장동, 내곡동 / 28통 182반
▲인구 : 19,502명 (2017년 4월 기준)
▲면적 : 13.78㎢ 
▲주민센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토당로83

2. 마을의 변천사
▲토당동
고양군 구지도면 토당리 > 지도면 토당리 > 고양시 덕양구 능곡동

▲대장동
고영군 구지도면 대장리 > 지도면 대장리 > 덕양구 능곡동

▲내곡동
고양군 구지도면 대장리 > 지도면 내곡리 > 덕양구 능곡동

▲신평동
김포군 > 고양군 지도면 신평리 > 지도읍 신평리 > 고양시 덕양구 능곡동

능곡동주민센터 전경

3. 마을지명 유래 
(1) 능곡동(陵谷洞)

능곡이라는 지명유래는 이 지역에 능과 같은 큰 무덤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실제로 이곳에서는 정씨 성을 가진 왕의 사위(부마)를 비롯한 많은 무덤이 있었다. 일설에는 이곳에 왕릉을 쓰려고 했는데, 골짜기 한 개가 부족해 왕릉으로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현대의 능곡동은 1900년대 초 경의선이 만들어질 당시 기차역의 이름을 능곡역으로 부르면서부터다. 기차역을 만들면서 역에서 가깝고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 '능골마을'이었는데, 이 마을의 한자를 따서 능곡이 된 것이다.

지금은 폐역이 된 예전 능곡역의 모습
2009년 신축된 능곡역은 주민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능곡의 유래가 된 능골마을의 능곡고등학교

(2) 토당동(土堂洞)
토당이란 지명의 유례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때 한양에 살던 선비들이 벼슬을 뒤로하고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워낙 가난하여 기와집을 짓지 못하고 흙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에서 유례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토당동의 대표적인 마을인 삼성당에 유명한 사당이 있었는데, 이 사당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토당동이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삼성당에서 지내던 도당숙, 도당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도당굿을 지내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도당리가 되었다가 그 음이 변하여 토당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고양군지에 기록된 토당동에는 총 72호가 있었다고 한다.

‘고양군지’에 따르면 토당동은 구지도면에 속했으며 삼창당리촌(三昌堂里村), 빙석촌(氷石村), 능곡촌(陵谷村)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총 72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토당동의 자연촌락으로는 사뫼마을, 얼음들, 삼성당 등이 있으며 자연촌락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사뫼마을 : 고양시의 네 번째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중 첫 번째 산이 일산에 있는 '일뫼'이며, 두 번째 산은 한강가 송포동에 있는 '이산', 세 번째 산은 토당동에 있는 '삼성당' 그리고 네 번째 산이 '사뫼'에서 유례되었다고 한다.
▲얼음들 : 이 곳에 한강물이 자주 들어와 추운 겨울이면 거대한 얼음판으로 자주 변했다고 하여 얼음들이라고 불렀으며, 벌판의 바람과 추위가 매우 거셌다고 한다.
▲ 삼성당 : 삼성당의 유례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한씨, 임씨, 송씨의 3성이 주로 살던 마을이라고 해서 삼성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한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산위에 흙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하늘에 있는 삼성을 모신다고 하여 삼성당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토당동 얼음들은 과거에 한강물이 자주 들어와 겨울에는 큰 얼음판으로 변했다고 한다.

(3) 신평동(新坪洞)
신평동은 새로 생긴 들판이 넓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새펄이라고도 불리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갯벌이었던 지역을 일제시대 때 형편이 어렵던 사람들이 개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본래 이 마을은 한강 건너편의 김포군에 속했는데, 홍수로 인해 한강 물길이 바뀌면서 1922년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한강 제반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김포와 고양 사이에 커다란 모래섬이 있어 두 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며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신평동의 자연촌락으로는 동녘펄, 조개벌 등이 있으며 자연촌락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동녘펄 : 김포군에서 볼 때 한강 넘어 동녘에 있는 벌판이라고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조개벌 : 한강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서 조개가 유난히 많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4) 대장동(大壯洞)
대장동의 지명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다. 그 유래로는 마을에서 큰 장군이 나온다는 전설과 함께 마을 뒤편에 있는 영주산의 산줄기 모양이 마치 큰 대(大)자 와 장사 장(壯)자의 지세를 가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고양군지’에 의하면 본래 고양군 구지도면 대장리 마을로 이곳에는 내곡촌, 갈산리, 냉정촌, 화수촌이 있었으며, 총 184호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화정동과 내곡동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마을이었다.

대장동의 자연촌락에는 갈머리 마을이 있으며, 부근 지역을 부르는 이름으로는 다물이, 동여울 뿌리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갈머리 마을 : 대장동 하대장에 속한 자연촌락의 이름으로 갈두촌(葛頭村)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강 제방이 쌓이기 전 영주산 줄기와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마을의 산세가 마치 칡(칡 갈 葛)이 엉킨 듯하여 갈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칡덩굴이 많아 갈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동여울 뿌리 : 대정역 부근을 부르는 소지명으로 예전 한강제방이 쌓이기 전 한강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물이 굽이쳐 흘렀다고 한다. 강여물 물이 흐르는 산줄기 뿌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물이 : 대곡동 상대장마을에서 내곡동 방향으로 있는 큰 골짜기의 이름으로 인근에 다물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유례는 우물에서 황금 수탉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졌고, '닭물이'에서 '다물이'가 되었다고 한다.

능곡동 자연촌락과 지명

(5) 내곡동(內谷洞)
내곡이라는 지명의 유례는 능곡 방향에서 봤을 때, 마을이 영주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곡동에 있는 마을이름으로는 안골과 뒤꾸지 마을이 있다. 안골은 영주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뒤꾸지는 대장동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골마을에서 바라본 영주산

4. 그 밖의 마을 이야기
(1) 대장리진교비(大壯里榛橋碑)

대장동 갈머리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에 건설한 나무다리 진교의 교량비로 《고양군지》에는 강세봉이라는 사람이 '진교'라는 다리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이곳에 대장교를 건설하면서 옛 진교비를 묻고,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대장진교와 대장리진교비

(2) 내곡동 느티나무
내곡동에 위치한 느티나무는 수령 235년, 수고 15m, 나무둘레 4m인 보호수이다. 나무의 밑부분은 내부가 비어있고, 뿌리의 돌출이 많으며, 뿌리 부분에 옹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전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의 잎이 피는 것을 보고 한해 농사의 풍•흉을 예상했다고 한다.

잎이 피는 것을 보고 마을 농사의 풍요와 흉년을 예상했던 느티나무

▲ 보호수 지정번호 : 경기-고양-24
▲ 지정일자 : 1982년 10월 15일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곡동 13-1

(3) 대장동에 전해지는 충견(忠犬) 이야기
대장동에는 주인을 위해 죽은 충견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충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개의 주인이 행주나루를 건너 김포장(金浦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다리 밑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풀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자 주인 옆에 있던 개가 다리 밑의 개울물을 온 몸에 축여 불을 끄고 주인을 구했지만, 개는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술 취한 주인이 잠자는 도중 호랑이가 나타나 주인을 해치려 하자 개가 호랑이와 싸워 결국 주인을 살리고, 자신은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주인을 살려낸 개에 대하여 그 주인은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다리 옆에 비석 하나를 세웠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의견비이며, 그 다리는 지금의 대장교(大壯橋)로 일명 갬비다리[개(犬)비다리]라고도 전해진다.  (출처 : 고양문화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충견 진돗개 <사진 = 진도군청>

5. 능곡동의 변천 과정

능곡역이 들어서면서 시장은 더욱 활발하게 번창하였다.

능곡동은 고양시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이 일대에 한강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물이 자주 범람하던 곳이었고, 삼성당 마을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후 제방이 만들어지고 경의선 기차가 들어오면서 능곡동은 학교가 지어지고, 장이 섰으며, 상가가 만들어지는 등 새로운 고양의 중심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에는 한강 제방의 붕괴라는 큰 사건을 맞기도 하였다.

주변의 화정과 행신 마을이 개발되면서 능곡 지역도 199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타지에서 능곡동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능곡동은 그린벨트 지역에 따른 옛모습을 유지한 농촌마을과 시장, 상가, 아파트 등 도시가 공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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