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향 감각을 잃고 사는 요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일과 일에 대한 성취의 의미'를 짚어주는 헨리 나우웬의 글을 떠올려 본다. 

바벨탑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해야 할 일을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수많은 욕망들은 우리 눈을 가려,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참된 행동이란 소명을 완수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일할 때나 여행할 때, 책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혹은 가난한 사람을 돌볼 때, 아니면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돋보이지 않는 평범한 일을 수행할 때나 언제든지 우리는 '나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어하는가?'가 아니라,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세상은 무섭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생각 속도보다 기계문명의 속도가 더 빨라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될 정도로 당황스럽고 곤혹을 치를 때가 있다.

잠시 광장 한 복판에서 부모의 손을 놓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망연자실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처럼 문득 우두커니 먼 허공을 바라보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세상은, 사람들은 내가 울거나 말거나 모두 자기 일에 바빠 내 곁을 그냥 스쳐갈 뿐이다.

"얘, 꼬맹아~ 그렇게 슬피 울 것 없다. 너 만한 때는 모두 그런 거야. 그러나 나이가 좀 들고 시간이 지나면 너는 결국 너 자신이 홀로임을 알게 되고 그 고독 속에서 스스로 너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뭐 별 수 없어. 그렇게 될 때까진 어리둥절한 채로 지금처럼 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큰 광장 한 복판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그 고독감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말이야... 그러나 너무 겁먹지 마라. 이제 곧 그것들과 친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시기가 오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 고유 전래의 격언은 이제 깨지고 있다. 같은 피를 나누었음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고 형과 동생이 서로 싸우고 있다.

최근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피보다 진한 것이 그 사람의 이념(사상)이라는 것이다.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피의 논리'가 이념논쟁에서 불꽃 튀기는 '힘의 논리'에 먹혀버린 꼴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안의 지역감정 정서가 바뀌었다. 예전의 지역감정이 한 풀 꺾이고 이제 대신 계층별 세대 간의 이념논쟁이 대세가 되었다. ‘영남이냐 호남이냐’가 아니라,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로 우리는 서로를 가르고 나름대로의 색안경을 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이 가장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는 곳은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판이다. 최근 국민정서 가운데 '금수저 흙수저' 담론이 회자되고 있다. 소위 금수저에 해당한다는 유명 정치인들의 핏줄인 자녀 문제가 출세가도를 막는 방해 요인 중에 으뜸가는 일이 된 것이다.

물은 흘려버릴 수 있지만 피는 그렇게 못 한다. 내가 나의 DNA로 심혈을 기울여 낳은 나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절대적 아비의 책임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 결과로 역대 많은 정치인들이 낭패를 본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또 자식으로 인하여 잃기도 했다.

하나님도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조롱과 야유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옆자리에서 이 우주만물을 호령하고 있었지만 막상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왕자라도 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기준이 아니라 이 땅의 기준에 맞춰야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인정을 받아야 함에도 그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움 받았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야 했다.

문제는 그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그 아들의 죽음을 보고 사람들은 "네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려 했다. 이 아버지는 그 아들로 인해 영광이 가려진 것 같이 보였다.

하늘의 아버지가 땅의 아버지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땅의 아비들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 어떻게든, 때로 불법으로라도 면류관을 씌워주려 애쓴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하늘 아버지는 역설적인 면모로 아들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에게 면류관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이다. 아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그 십자가의 쓴 잔이 자신을 비켜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막상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에는 하늘을 향해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죽어가는 아들을 내려다보며 침묵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하나님, 꼭 이런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셔야 합니까? 꼭 자신의 아들을 끔찍하게 죽여가면서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 주셔야 하겠습니까!'라는 항변이 솟구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건이 십자가 위에서 아들의 입을 통해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혼잣말처럼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실제로 그의 죽음 직후 세상은 깜깜하게 어두워져 하나님 영광마저 가리는 듯 했다. 그 침묵의 적막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의 소외'는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처럼 죽을 지경이 되어 절망에 처할 때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운 그 피의 언약을 잊은 듯 피의 자녀된 우리를 철저히 외면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때로 십자가 위에서의 "다 이루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고백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무엇을 가장 하고 싶어 하십니까? 당신의 생애 동안 무엇을 이루고 싶습니까? 그리고 그 소원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당신이 꿈꾸고 계획해 왔던 '자아실현'의 과정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열매 맺길 원하십니까?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워졌던 바벨(babel)탑이 무너진 그 시점으로부터, 그 무너진 터 위에 세워진 십자가로부터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하늘의 선물들이 주어질 것이다. 물보다 진한 피의 사랑,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다~ 이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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