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자 최윤식 소장의 저서, <2030 대담한 도전>에서 "중국의 기세가 꺾이고, 미국의 시대가 다시 오는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 삼성이 최고의 위기에 직면할 정도로 한국 기업의 미래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애플은 자동차산업에 반드시 뛰어들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또한 미래학자로서 그는 2030년을 겨냥한 예측을 말하면서 눈앞에 직면한 미래에 대해 "진짜 위기는 2018~2019년에 올 가능성이 크다. 2016~2017년에 그 전조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미래 카드를 제시한다.

최근 사회미래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낙관론적인 미래의 예측 시나리오라면 건성으로 흘려보낼 수 있지만, 극단적인 비관론의 입장에서 조망하는 미래 예측 시나리오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utopia)의 세상이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 逆유토피아)의 암울한 명암이 인류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말한다. 두려움은 미래적인 것이다. 걱정과 염려, 불안 속에서 공포감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의 미래는 미래학자가 아니라도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으로 생각이 기울 수밖에 없다. 미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또 다른 차원의 세계이므로 두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세상이기에 이것은 공간적 개념으로도 전세계적이다. 
 
물론, <The Rational Optimist 이성적 낙관주의자> 라는 유토피아적 책을 펴낸 대중과학 저술가인 매트 리들리(Matt Ridley)의 이론도 있지만 사실 이러한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리들리의 이론이 보다 현실적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낙관론이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면에서도 인간이 처한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며 인간 내면 깊숙이 잠재워진 마음과 생각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인류 역사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의 분기점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만 주어진다면 이는 오류이다. 근본적으로 현재 인류의 미래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가 처한 이 나라의 현재 상황과 미래를 생각해본다. 거시적이고 근원적인 사회 문제로 우리가 안고 있는 고령화, 저 출산, 청년실업 등 너무 산적한 문제들이 우리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사회 문제들을 안고 있는 세상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자신의 현재 위치도 힘겨워 한다는 데 존재감의 위기가 있다.

사드 배치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지난 세월호 사건처럼 계속하여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이는 세월호 사건이 단순히 안산이나 단원고에 국한된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듯이, 성주나 김천이라는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국가안보에 관한 일이지만, 이는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끼어 눈치를 봐야 하는 우리나라의 서러운 실상을 우리 국민은 피부로 느껴 알고 있다. 그리고 군사적인 부분에서나 경제적인 부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정부의 정치외교적인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들에 대해 묵과할 수도 없다. 
최근 북한이 쏘아올린 SLBM(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최첨단 미사일이라고 자랑하는 사드(THAADTerminalHighAltitudeAreaDefense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보다 한 수 위로 남한이나 일본 뿐 아니라 미국 본토에까지 탐지가 불가능한 잠수함을 이용해 최단거리 접근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가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과의 정치적인 사안도 계속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독도 문제가 그렇고, 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쉽게 일본이 승복하고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것 같지 않다. 더욱이 일본이 최근 미국과의 묘한 외교관계가 성립되면서 일본은 더욱 기세등등하다. 한류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 최근 반한(反韓)감정을 가진 반한류의 거친 시위 행태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북한의 김정은과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일 듯하다. 북한의 굶주리고 헐벗은 국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세계적 비난 때문에 기득권을 누리는 북한 권력자들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예측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북한에 대해 통일문제는 차치하고 제발 핵무기만은 건들지 말기를 사정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당면한 많은 위기들이 산적해 있을지라도 국내외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돈으로부터 풀려질 수 있다고 우리 모두는 믿고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의 모든 수단 역시 경제 제재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역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으름장을 놓는 산적의 칼날과 같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이 돈의 문제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이치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것이 세상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러나 최근 우리 주위 재벌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제의 난'(롯데, 삼성, 현대 등)을 보면 그 비극의 결과를 알 수 있다.

최근 상영된 영화, 조디 포스터 감독의 '머니 몬스터(Money Monster)'는 2013년 국내에서 개봉된 바 있는 김병우 감독의 '더 테러 라이브(The Terror, Live)'를 생각나게 한다. 괴물 같은 돈, 괴물 같은 방송언론 그리고 이를 즐기는 시청자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들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금융가의 본산인 월스트리트의 비밀을 파헤친 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 역시 우리가 싸우는 최종 상대가 돈과의 싸움임을 말해준다. 돈의 힘과 영향력 앞에서 우리 모두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비극을 꼬집는다. 그렇다. 현대에 있어 돈은 괴물과 같은 존재로 괴력을 자기 마음껏 휘두른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흐름은 돈의 흐름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맘모니즘(mammonism)의 횡포가 있다.

지금 우리의 시계는 고장난 시계처럼 정지돼 있거나, 심지어는 벤저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가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회복하기 위해 대담한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모험의 시간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용기를 내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