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스페인은 가보고 싶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는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이 마음을 끌지만, 더욱 내 마음을 기울게 하는 것은 거리에서의 투우 축제이다.

사람들이 투우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출처 : Midi Libre>

경기장에서 투우사들이 투우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은 동물 학대 논란도 있거니와 개인적으로 인간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사진처럼 황소를 거리에 풀어놓고 골목길의 사람들이 그것을 피해 도망가는 놀이(?)는 아무래도 스릴 만점이라 생각한다.

참 묘한 것이 인간의 감정이다. 인간의 내면 안에 새디스트(sadist 가학성애자)가 있는가 하면, 마조키스트(masochist피가학성애자)가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폭력성을 증오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즐긴다.

권투나 격투기가 그렇다. 스페인의 투우 역시 경기장에서 잔인하게 황소를 죽이는가 하면, 또 황소를 거리에 풀어 놓고 그것으로부터 떠받치거나 밟히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며 그래도 즐겁다고 낄낄 거리는 모습들이 그 양면성이다.

투우사와 투우 간의 대결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럴까요? 인간 내면의 양면성, 양가감정(兩價感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발전도 하고 또 퇴보도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쳐 나오기 원하면서도 또 자신 스스로 다시 그 고통의 현장을 찾아 간다.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계속적으로 유지되면, 답답하고 지루해 못 견뎌 한다. 그래서 일탈(逸脫)을 시도한다.

평범을 내세우며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안일주의는 사람을 재미없게 만들고 무개성의 사람을 만들어 거기엔 도전도 없고 새로움도 없이 똑 같이 평이한 권태만이 있다.

발칙한 상상입니다만 에덴에서의 범죄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창조주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주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에서 죄를 범했다. 선택과 결과이지만, 아마 인간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 싫증을 낸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응당 지켜야 할 안정된 규범의 세계를 스스로 깨뜨린 것이 아닌가?

나는 평범한 것이 싫다. 남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기가 싫다. 남들이 어떻게 하든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이끌어 간다. 그 중에 결과적으로 그것이 남들과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드러나게 될 뿐이다.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나를 평가받는 것이 싫다. 나 자신은 그 정해진 고루한 틀 안에 나를 묶이기도 싫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서 나를 멋대로 규정지으려는 사람이다. 내가 그의 기준 틀 안에 갇히어 평가받는 것이 싫은 때문이다.

남을 쉽게 평가하는 태도처럼 얼마나 교만하고 불손한 일이 또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을 내 기준에서 함부로 평가하고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성경에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불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험악한 세월만큼 그의 삶은 큰 스펙트럼 안에서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나의 삶도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들이 있었다. 결코 평범치 않았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평범했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더 넓은 세계들을 깊이 있게 체험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다. 구태의연한 관습의 틀과 고리타분한 사고의 범주로는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없다. 이제 무조건 내 말에 따르라고 하는 순응의 시대는 지났다.

사람들은 검토나 검증 없이 맹목적으로 윗세대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 스스로 충분히 두들겨 본 후, 어느 정도 타당성을 확증하고서 순응한다.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다. 다음 세대들이 새로운 가치로 도전할 수 있고 삶을 열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도전의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이 길만이 내가 살 길이고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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