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 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얼마 전에 동네 심학산 둘레길을 돌다가 움찔한 사건이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숲길의 커브길을 막 돌아섰을 때 내 앞에 어떤 복면의 건장한 사내와 맞닥뜨리게 되어 에그머니나~ 하고 여자처럼 놀랐기 때문입니다. 깊이 눌러 쓴 캡에 짙은 색의 선그라스 그리고 눈 밑은 수건 같은 것으로 완전히 가린 얼굴이었습니다.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나는 무서웠습니다.

상대방은 나의 놀라는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심히 자기 길을 갔습니다. 요즘엔 곳곳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기 했지만,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뉴스에서 복면을 한 IS 테러범들의 모습과 TV 노래자랑 프로인 '복면가왕'에서의 복면은 그 의미가 다를 것입니다. 전자는 완전히 자신의 신분노출을 은폐하기 위함이지만, 후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되 보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는 점에서 그 목적이 다릅니다.

복면가왕의 노래자랑에 출전하든, 길거리에서 가면을 쓰고 전도하든 그것들이 내게 큰 의미는 없습니다. 다만 연극 무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일들이 왜 일상적인 삶의 한 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닌 또 다른 얼굴로 접근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테러범이나 도둑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런저런 면에서 나의 진면목을 숨기고 상대방이 잘 알지 못하는 가면(persona)을 취하여 적당하게 활용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가면을 사용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 일단 진실을 숨기고 시작하는 것이고, 상대방 역시 가면을 쓰고 자신 앞에 선 사람에게서 진실을 그대로 얻어낸다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약간은 서로의 사이에 '거짓'을 공공연한 묵계로 깔고 시작하는 관계이기에 나름대로 자신 편에서 스스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상대를 끌고 가면 될 뿐입니다. 내가 접근하기도 어려운 반면, 서로가 인정하는 거짓의 관계로 시작하기에 불리하다 싶으면 빨리 발을 뺄 수도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요즘 TV 프로를 보면서 나대로 좀 엉뚱한 푸념을 합니다. 겹치기 출연으로 그게 그 얼굴이 많아서 좀 식상한다는 것입니다. 토크 쇼나 개그 프로그램에 있어서까지 그렇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순간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면 한동안은 그 얼굴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여 재미없게 느낄 때도 많습니다. 내 안에 숨겨진 묘한 질투나 시기심 때문도 있겠지만, 뭐 꼭 그렇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나처럼 느낄 테니까요.

그래서 마스크가 필요합니다. 복면을 쓰고 나의 얼굴을 숨기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그 얼굴 계속 보기보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이리저리 멋대로 추리하는 것이 더 관심과 재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나를 알아 볼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라도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은 긴장감을 덜 수 있습니다. 가면이 그 눈빛들을 막아주니까요.

가면은 내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강하게 표출할 때 요긴하게 쓰입니다. 가면의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와 의미를 어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나를 철저히 숨기고 싶어서 사용합니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 내가 보여준 내 얼굴에 책임을 지는 것이 너무 무겁고 두려워 가면 뒤로 잠시 숨고 싶은 것입니다. 배우들의 화장 역시 자신의 강렬한 이미지 뒤로 숨고 싶은 또 하나의 새로운 자신의 모습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온 나라를 들끓게 하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이들 온 가족들의 이름이 모두 제 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조격인 최태민 씨부터 이름이 7개나 되고, 그 자녀에서 손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들을 바꿔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모두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또 다른 나'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지금도 국민들 앞에 자신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거나 모자이크 처리해서 제대로 본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름뿐만 아니라 신분에 있어서도 최태민 씨는 목사, 승려, 교주... 등의 여러 가면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막후 세력으로 자신은 숨긴 채 비선(秘線) 실세로 활동해왔다는 것에 국민들은 어이없어 합니다. 그리고 더욱 분노한 것은 자신의 이권창출을 위해 대통령의 이름을 앞세워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는 것에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 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 스스로도 못 알아보도록 덕지덕지 처바른 얼굴의 화장을 지울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 없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짧은 만남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가면이 필요합니다. 가장 빠르게 자신의 이미지를 어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만남과 관계들은 허상이기에 우리는 나의 필요를 위해 가면을 사용했지만 뒤돌아서서는 더욱 공허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첫 포인트는 '진실'인데, 그 진실을 비켜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가면의 껍질들을 벗어버립니다.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은 마치 양파 껍질 하나하나를 벗겨 가듯 그렇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의 간격을 없애고 그 둘의 사이를 좁혀 일치되도록 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게 자유인입니다.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새롭게 시도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가면을 쓰는 일입니다. 가면 뒤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은밀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대단한 일들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냥 버티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면 뒤에서 영영 나의 얼굴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잠시의 일탈은 새로운 재미를 가져올 수 있지만, 가면 뒤에 가려진 일이기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지겹고 힘들더라도 그리고 재미없는 일상의 연속이라도 결코 그 '일상성'에서 떠나면 안 됩니다. 그 일상성의 내 모습 그대로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일이 있다면 이는 진정한 모험이요 도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다운 자유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의 일상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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