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목사

맘몸(mammon)은 부(富)를 뜻하는 용어로, 신약성서에서는 부, 돈, 재산, 소유에 대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맘모니즘(mammonism)이란 부, 돈, 재산, 소유, 재물, 물질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나 행위를 의미한다. 물질만능주의, 물신숭배 풍조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교회가 맘모니즘(mammonism)으로 덮여진 안개구름 속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지난 13일 JTBC 뉴스룸은 12일에 있었던 명성교회의 세습 논란을 집중 보도한 데 이어 어제 14일 뉴스룸에서도 명성교회의 세습 논란을 빗대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현대 교회들의 모습들을 지적했다.

명성교회 모습 <사진 = 명성교회 홈피>

손석희 앵커는 리처드 핼버슨 목사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는 말의 끝머리에, 한국 대형교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다큐 영화 <쿼바디스 Quo Vadis>를 2014년 제작했던 김재환 감독의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라는 말로 마무리 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축구 해설가, 이영표의 "오늘 수십 년 동안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어쩌면 존경받는 모습으로 떠날 수 있었던 한 목사의 마지막 퇴장이 비참하게 ‘세습’이라는 이름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비난이 쏟아지도록 지금 한국 교회는 아니 한국 사회는 대형 교회의 세습 논란으로 뜨겁다. 교회 모습을 비참하게 만든 슬프고도 비극적인 종말 사건이다.

김재환 영화 감독은 뉴스룸의 화면에서 "What would Jesus do?" 라는 영어 표기의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따위의 교회 작태들을 눈꼴사납게 보시지 않겠느냐 하는 말일 것이다.

돈이 제왕 자리에 앉아 하나님과 어깨를 겨루며 힘의 논리로 밀어 부치고 있는 현대사회의 현실 앞에 교회는 얼마나 무력하며, 또한 얼마나 부끄러운가?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왜 생겼을까? 궁극적으로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부(富)하려 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6-10) 

개인적으로 명성교회 세습 사건에 대해 아쉽고 안타깝다. 아버지 목사(김삼환 원로목사)가 은퇴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을 모으려 하지 말고, 분산시켜야 더욱 큰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교회 분립개척을 시도하여 성공한 사례들이 많다. 분립개척한 아들 목사의 교회에게 더욱 힘을 실어준다면 그의 영향력은 양 쪽으로 두 배나 더 증가할 것이다. 명성교회의 후임자도 그리고 교우들도 더욱 존경할 것이다.

김삼환 명성교회 원로목사 <사진 =명성교회 홈피>

아버지 목사가 아들(김하나 목사)에게 세습 위임을 하면서 축복 안수를 아버지인 자신보다 다른 목사를 통해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자녀 결혼 주례나 성례식 등은 가능한 다른 목사에게 부탁하는 것이 겸손의 지혜라 생각한다.

아들 목사에 대한 아쉬움은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성경의 교훈과 맞지 않게 왜 새 술을 종전의 낡은 부대에 그대로 담으려는가 하는 것이다. 새노래명성교회의 담임 목사로 새 부대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고 진취적일 것이다. 왜 낡은 아버지 대물림 교회에서 십자가 아닌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기독교는, 성경은 '역설의 진리'로 가득한 책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역설이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진다. 이 역설적 진리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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