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니스트
박종호 칼럼니스트

[고양일보] 1960년 4·19 이후 64년 만에 최초로 이승만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그동안 이승만은 독재자로 각인되어 언급조차 금기시됐다. 처음으로 이승만의 참모습을 본 국민은 놀라움과 미안함으로 울었다.

1948년, 73살의 노인이 공산주의로부터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얼마나 어렵게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세웠는지 알고, 말년에는 너무나 불쌍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신 것을 보고 또 울었다.

영어 제목은 ‘한국의 탄생(The birth of Korea)’이지만, 굳이 감독은 ‘건국 전쟁’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승만이 전쟁을 치르듯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대한민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웅의 일대기를 100여 분만에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독재자와 살인자로 왜곡됐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뒤집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1875년에 몰락한 왕손으로 태어난 이승만은 과거 준비를 하던 중,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20살이 되던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재필로부터 민주주의·민족주의·사회개혁 등 개화 문명에 눈을 뜨게 된다.

1899년 24세에 박영효 등이 주도한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로 투옥되어 1904.8.9.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 동안 한성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승만은 1904.2.9. 일어난 러일전쟁을 한성 감옥에서 봤다. 전쟁이 끝나면 어느 쪽이 차지하든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다.

29살의 이승만은 감옥에서 4개월 만에 ‘독립정신’이라는 400여 쪽에 달하는 책을 써서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이승만은 감옥에 있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하고 200여 권의 영서(英書)와 300여 권의 한서(漢書) 등 500여 권의 책을 읽은 당대 최고의 선각자요 선지자였다.

1904년 석방된 이승만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간다. 30살인 1905년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한 이승만은 5년 만에 하버드대학 석사와 프린스턴대학 국제법 박사학위까지 받는다. 단기간의 믿을 수 없는 학문적 성취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이승만은 조국의 독립은 무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외교력으로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70살에 조국이 해방되고, 은퇴 시점도 훨씬 지난 73살에 신생 독립 국가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일생을 짧은 기록영상으로 모두 보여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이 전혀 몰랐던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왜곡된 사실을 깨우쳐 주기엔 충분하다.

영화는 중요한 오해를 풀어준다. 우선, 남북 분단의 책임이다. 소련은 해방되자마자 북한에 진주하여 1945년 8~9월에 남북한 간의 통행과 통신, 우편을 차단했다. 이미 소련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에 공산화 계획을 세워 계획대로 착착 진행했다.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에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 슈킨에게 북한에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구축할 북한 정권 수립’을 명했다.

만일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권을 세우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일성과 소련에 이승만은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독재자 프레임이다. 언론이 자유롭고, 의회가 정상적이고, 집회도 자유로웠는데 독재자란 프레임을 씌웠다. 이승만 때문에 적화통일을 하지 못한 공산주의자의 선전·선동과 야당의 정치 구호 탓에 독재자가 되었다.

셋째, 3·15 부정선거 오명, 1960년 선거에서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했다. 부정은 대통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자유당이 대통령도 모르게 저지른 것이다. 그 결과 일어난 4·19 희생자를 눈물로 위문한 뒤, 사태에 책임지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내려놓았다. 세상 어디에 이런 독재자가 존재하는가.

넷째, 초대 내각에 친일파 등용했다는 오해. 영화는 북한과 대한민국의 초기 내각 명단을 상세하게 보여 준다.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내무장관 윤치영, 상공장관 임영신, 농림장관 조봉암 등 대부분 항일 독립운동가다.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자인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역사는 기본적인 사실마저 왜곡해서 가르쳤다.

다섯째, 이승만은 6·25 때 서울시민에게 남으라는 방송을 하고 본인은 달아났다는 왜곡. 미 CIA의 6월 27일 자 감청자료 분석에 따르면,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달라’는 얘기는 아예 없다. 오히려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망명을 권하자, 권총을 꺼내 “이 총으로 이 방에 들어오는 인민군을 쏘고, 아내를 쏜 뒤에 마지막 한 발은 내게 쏘겠다”라고 이승만은 결연하게 망명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는 진실과 전혀 다른 사실을 주입해 왔다. 잘못된 역사를 만들었거나, 바로 잡지 못한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6·25 전쟁에서 이승만과 백선엽 장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좌파는 이들을 친일파라 비난하고 매도했다.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건국 초기 국가 예산의 20%를 교육에 투자하고, 스위스도 못 하던 여성 참정권을 실시했다.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어 1978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를 우리 힘으로 세우게 했다. 이승만은 1952년에 일본과 우방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선을 선포해 연안수역과 영토 보호에 앞장서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거의 강제로 맺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장치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4·19 때 숨진 학생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눈물짓고, “불의에 항거하는 학생이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85세의 힘 없고 돈 없는 늙은 대통령은 1960.5.29. 아침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살 거처도 없지만 고향과 같은 하와이에 잠시 쉬러 가기 위해 가방 몇 개를 들고 떠났다. 그러나 다음날 경향신문은 ‘이승만 대통령 망명’과 함께 ‘해외에 재산 막대’라는 오보를 1면에 크게 실었다.

경향신문 1면 기사, '해외에 재산 막대? 후여사와 외교관이 마련'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경향신문 1면 기사, '이박사 하와이로 망명' 및 '해외에 재산 막대?'라는 제목이 보인다.

망명 보도로 한국에 돌아올 수도 없게 된 이승만은 하와이 교포가 빌려준 집에서 살다 요양병원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숙소와 생활비를 제공해 준 교민에게 유일한 재산인 서울의 이화장을 양도한다는 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한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의 부강한 조국을 꿈꾼 이승만에 대한 진실을 이제라도 모든 국민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몇 권의 역사책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주는 교훈과 감동, 울림이 더 크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한국사 시간에 보여줘야 할 역사 기록물이다. 게으르거나 무능한 역사학자들에게 가시 채찍과 같은 영화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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