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겸임교수

(전 청와대 외교보좌관실 행정관)

 

외교가에 전설처럼 떠도는 전설 같은 낭만 스토리 한 가지. 반기문 3등서기관의 첫 해외공관 부임지는 인도였다. 서울대 외교학과, 외시 차석에 엘리트 코스를 보장받은 청년 외교관 반기문은 마음만 먹었다면 워싱턴, 파리, 런던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라니? 아니 왜?

당시 인도의 정치사정은 북한에게는 대사관 개설을 승인하면서도 한국에게는 끝내 총영사관으로 그 격을 낮추어 차별예우를 하던 만만치 않은 제3계 국가들의 리더였다. 그러나 반기문 3등서기관이 근무하던 기간 중 한국총영사관은 강력한 북한의 반발과 인도정부의 비협조적 자세에도 굴하지 않고 수없는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드디어 대사관 승격의 외교적 개가를 거두게 된다.

인도정부로부터 대사관 승격 공식통보를 받던 날, 총영사관은 그야말로 감격의 눈물바다였다고 전한다. 마지막까지 공관에 남아 서울 외교부 본부에 낭보를 알리는 외교전문을 쓰는 업무는 일 잘하고 책임감 강하기로 소문난 반 외무관에게로 돌아갔다,

총영사관 간판으로 일하던 마지막 밤. 자정이 넘어서까지 외교전문 쓰기에 몰두하며 복받치는 감격과 두껍게 쌓인 피로감과 싸우던 반 외무관은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사과를 무심코 한입에 베어 물고 문서작성에 몰두했다.

초코파이도 컵라면도 없던 시절. 모두가 퇴근해버린 텅 빈 총영사관에 남아 반 외무관은 자신의 도전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마지막 혼신의 힘을 쥐어짜며 업무에 몰두했으리다.

그런데 그의 입속에 들어간 사과 한 조각이 문제였다.

지금도 인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통하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 가급적 야채를 날 것으로 먹어서는 안 되며, 과일도 절대로 껍질째 먹지 말아야 하며, 모든 음식은 반드시 익혀먹어야 한다는 경고가 바로 그것이다.

늦은 밤 뉴델리 공항을 나서면 수많은 어린이들의 검은 눈동자들과 마주쳐본 경험이 있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그 어린 영혼들이 내밀며 일 달러를 구걸하는 손에 얼룩진 때국물과 냄새를 쉽게 잊지 못하리라.

푸른 산과 맛난 능금을 먹으며 자란 충청도 시골 청년 반 외무관에게 있어서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본능적 반사행동이었을 바로 그 사과 한 입 베어먹기.

다른 잘나가는 외교관들이 불가능하다고 기피하고 외면해오던 그 어려운 일을 해낸 행복감. 공복감. 그리고 갑자기 몰아쳐오는 피로감으로 인해 그의 몸은 인도 사과에 대한 경계심을 잠시 잊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 다음 날부터 고열이 오르기 시작한 반 외무관은 결국 의식불명의 지경에 이른다. 급히 서울에 후송조치 된 반 외무관은 당시 청와대 아래쪽에 위치했던 국군통합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일주일이 넘도록 의식을 찾지 못하던 반 외무관에게 담당의사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부인 유순택 여사를 조용히 부른 담당의사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연락해서 마지막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차라리 의식을 되찾지 않는 것이 다행일 지도 모릅니다. 오랜 고열로 의식불명을 겪은 환자는 깨어나더라도 뇌에 치명적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을 위해서나 가족 분들을 위해서나....”

그러나 유순택 여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의 곁을 미련하다싶을 만큼 완강히 지킨 유여사의 눈앞에서 반 외무관은 거짓말처럼 눈을 뜬다. 이름을 물어보고, 고향을 물어봐도 모든 질문에 똘똘하게 답하던 반 외무관.

그러나 그 순간 이후 오늘 이 순간까지 반 외무관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결코 똑같아 질 수 없는 변화가 한 가지 생기게 된다.

그 것은 바로, 감기몸살.

맹독성 고병원균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반 외무관의 면역체계는 결사항전을 별이며 생명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 덕분인지.. 그 때문인지.. 

반 외무관은 그 이후 단 한 차례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낭만 스토리.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지혜가 인도에서도 통했던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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