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대통령 내외가 한국을 방문했던 날도 어느 때와 다름없이 국빈행사가 분주히 진행되고 있었다.

국빈 만찬 헤드 테이블에 앉은 권양숙 여사는 연한 노란 색조 한복을 입고 있었다.

무궁화 자수가 돋보이는 권양숙 여사의 단아한 한복 자태에 대해 파키스탄 대통령과 영부인은 화려한 덕담과 찬사를 놓치지 않았다. 전형적인 외교적 소통장면이다.

그런 와중에 작은 위기 한 두 가지 터지는 정도야 뭐 낭만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낭만외교 컬럼]을 읽으신 독자라면 당연히 이쯤에서 기대감을 높이고 기다리실 듯. 물론 예외 없이 위기는 오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경호실 요원의 인간적 실수가 발단이었다.

청와대 오만찬에서 음식을 서빙 하는 분들은 호텔 직원들뿐만이 아니다. 특히 헤드테이블에 식음료를 서빙 하는 분은 대통령 경호실 직원들이다.

태권도를 비롯한 각종 무예의 합이 10단은 족히 넘는 베테랑 경호실 요원들만이 양국 정상 내외분과 VVIP 고객이 배석하는 헤드테이블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전의 오랜 관행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빈만찬이 이루어지는 청와대 영빈관에는 사실 일반적인 의미의 주방이 존재하지 않는다.

200명이 넘는 만찬 귀빈들에게 거의 동시에 음식을 넣고 빼고 독극물 포함여부를 테스트 하는 작업은 눈썹을 휘날리며 분초를 아끼며 해야 하는 힘든 일 가운데 하나이다.

그날따라 시간에 쫓기던 경호관이 권양숙 여사 앞으로 뜨거운 스프를 내려놓다가 그만 치마폭에 흘리고 만 것이다.

실로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숨죽이며 헤드테이블을 주목하고 있었다. 만찬장에는 경호실장과 주치의를 비롯한 의료진이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 실수는 경호실 직원들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장 당혹스러웠을 당사자는 다름 아닌 권양숙 여사 본인이었다.

그 뜨거운 스프가 떨어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처럼 “앗 뜨거” 소리를 내게 되면, 만찬장은 곧바로 비상상황으로 변할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권양숙 여사.

조금이라도 화상을 입은 경우, 연일 이어지는 공식 업무에 대한 지장이 발생할 수 있고 경호실 직원들 여러 사람이 문책을 받을 것이 명약관화해 보였다.

거기다 화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치의와 의료진이 권양숙 여사를 위한 응급처지를 하느라 국빈만찬은 그야말로 파장분위기로 치달을 것이 당연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오전부터 성남공항 환영예포 행사, 청와대 정원 공식 환영 행사에 이은 정상회담. 그리고 오후에 별도 일정을 소화하고 숨 가쁘게 진행된 하루 일정으로 인해 권양숙 여사는 무거운 피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 순간 권 여사는 새롭게 외교적 위기의 중심에서 지혜를 발휘해야만 했다. 아니, 모두가 그래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권양숙 여사는 입을 열었다. “오늘 파키스탄에서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셔서 제가 정성스럽게 한복을 갖춰 입었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장식까지 얻게 되었으니, 제가 이 한복은 절대 빨지 않고 기념품으로 고이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우리 두 나라 국민들의 우정을 위하여...”

상황은 웃음과 박수, 안도의 한숨을 통해 단번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만찬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분주히,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아무도 문책 받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을 지는 일 없이 상황은 종료되었다.

외교는 순발력이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며, 평범할 수 있는 일상을 각별히 소중한 순간을 바꾸는 낭만의 예술이다.

권양숙 여사 통역 중인 필자

북한산 기슭 영빈관의 국빈만찬은 그렇게 평화로운 낭만 속에서 성대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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