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겸임교수

(전 청와대 외교보좌관실 행정관)

 

# 장면 1 - 엘리자베스여왕은 국가대표급 세일즈 선수

버킹검 궁은 거대한 사교장이었다. 다른 나라 호스트는 크고 검은 리무진을 타고 우아하게 손님을 맞지만, 엘리자베스여왕은 수백 년의 전통을 지키느라 마차를 타고 모든 방문정상들을 맞는다.

수천 번의 정상통역을 맡아왔지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통역은 비행 중의 헬리콥터와 흔들리는 마차 내 통역이다. 통역 그 자체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은 마차에 오르고 내릴 때 마차가 너무 흔들려 울렁증이 나오는 속에서 대화의 흐름을 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공은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수백 년 된 의전의 전통을 우아하게 수행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입장하는 필자

 

# 장면 2 - 국빈만찬은 대기업 사교를 능가하는 사교 전쟁터

국빈만찬에 앞서 양국 정상들과 수행단은 환담을 나누는 것이 관례이다. 한국 측 수행단은 대부분 너무나 수줍어 하고 과묵하며 대화에 어눌하다. 장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럴 때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고, 상대방의 대소사에 관심과 정성을 보이며 우정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외교의 기술이다.

바로 이 순간 엘리자베스 여왕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상냥하게 상대방 환심을 사기 위해 노골적인 수다의 장을 펼쳐주었다.

한국에서의 추억, 안동 방문의 유쾌한 에피소드, 한국 대통령 내외의 가족주변 소식 등. 한국 아지매의 수다와 견주어 조금도 빠질 것이 없는 엄청난 기운과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공주들도 이에 질세라. 겸손하고 수줍게 미소 지으면서도 한국 영부인 양 측에 다가와서는 한국의 한복이 왜 이렇게 고운지, 천의 소재는 무엇인지, 염색은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영부인이 시차에 너무 힘드실 테고, 영국의 날씨가 오늘도 엉망진창이여서 우리의 기대를 역시 배신하지 않는다는 등등.

다시 시간을 조금 빨리 돌려 만찬 시작을 알리면 만찬장은 모든 귀빈들의 수다소리가 버킹검궁 만찬장을 가득 메운다. 근엄함과 권위를 예상했던 한국의 국빈방문단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과 관심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다. 골프가 운동이 아니듯 화려한 만찬은 식사가 아니었다. 그 외교의 전쟁터에서 우리는 너무 벙어리 노릇을 부끄러움도 없이 당연하다는 둣이 이행하곤 한다.

골프 연습하듯, 비즈미스 미팅도 매너와 대화준비를 꼼꼼히 하듯이 외교도 모든 것이 국익을 위해 치밀하게 노력하는 거대한 잔치상이다.

 

# 장면 3 - 상다리가 휘어지는 만찬은 후진국 스타일

유럽의 모든 외교만찬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단출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교부 등의 중앙부처가 한 달에 걸쳐 대통령의 외교협상 준비를 하고 여러 차례의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거쳐 방문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대통령과 각료들의 귀하고 아까운 시간을 써가며 국가의 정책에 사용해야 할 귀한 시간을 사용한다.

열 시간 넘는 비행기 시간과 여행시간을 감수하며 불과 몇 시간의 정상간 대화, 장관간 대화를 하러 날아가는 것이다.

외교의 목적은 물론 국익이다. 비즈니스와 무역의 새로운 원동력 확보가 전략의 핵심이다.

그런 값비싼 준비와 기회비용을 치루며 전 세계 국가정상들은 해외순방을 열심히 한다. 특히 수출입이 GDP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한국경제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불과 한 시간 반 동안 만찬은 그래서 소중한 기회이다. 정상회담은 언제나 1시간 미만이다. 그 중 통역이 반이고, 초기 10분은 분위기 조성(ice Breaking)과 덕담으로 쓸 수 밖에 없다.

정상의 입장에서 따져보면 수십 개의 중요한 관심사들을 불과 20분 이내에 결론 내려야 한다는 계산이다.

부족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만찬을 갖는다. 따라서 만찬에서도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귀한 시간에 자국의 신선로를 맛보시라고 음식을 넣고 빼고 김치가 맛있으니 더 드시라고 접시를 넣고 빼는 순간 정상과 장관들의 대화는 그 흐름을 잃어버린다.

우아한 국격과 매너를 지켜야 하는 외교가의 만찬은 음식이 서빙되고 빈 그릇을 빼는 동안 우아하게 기다려야만 한다. 아까운 외교시간의 중단이다. 수 십 조의 IT투자 협력을 설득하던 한국의 대통령이 갑자기 김치와 한류 음식이 테이블에 들어오고 나가는 동안 대화를 끊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만찬음식은 영부인들이 나서서 정성을 다해 메뉴를 고르고 외교를 배려하고 협상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편안하고 상쾌한 만찬 분위기와 흐름을 기획해야 한다.

대한민국 아지매의 배려와 섬세함이 실력을 발휘할 최적의 무대가 바로 이 외교 만찬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영부인들은 오찬과 만찬의 접시 숫자를 최소화한다. 한 접시에 생선과 야채, 고기 등 가급적 한 방에 꼭 필요한 음식을 접대한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음식 서빙의 횟수는 반드시 최소화해야 한다. 너무 강한 토속음식도 피해야 한다. 어느 나라 손님이건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적당한 향과 맛의 음식이 바로 외교의 국제적 기준이다.

민속음식은 물론 자랑거리지만 만찬에서 이를 자랑하는 것은 하수 중 하수이다. 그래서 현명한 영부인이 꼭 필요한 법이다.

 

반기문 오스트리아 대사와 유순택 대사부인은 재임기간 중 매일 밤 반복되는 비엔나 만찬행사에 왈츠가 빠지지 않자 아예 왈츠 개인교습을 배워야만 했다.

대부분의 한국 대사 부부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왈츠 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어색하게 박수치는 모양새가 외교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자책한 결과였다.

재미없이 밤낮으로 주말도 없이 일만 하는 남편을 위해 유순택 여사는 늦은 밤 왈츠강습을 해야 했다.

그녀는 남편이 근무하는 해외 공관을 따라다니며 화려한 외교만찬의 음식 준비를 위해 며칠 밤낮을 대사관 주방에서 전 부치고 고기를 굽느라 종아리에 쥐가 나서 고생해야 했다. 

그 옛 추억들을 반기문 장관은 가끔 미안해하며 이야기하곤 한다. 남편의 외교전쟁을 위해 뒤에서 실수없도록 뒷바라지해야 하는 외교관 부인들의 책무. 조금도 화려하지 않고 부러울 바 없는 고생길이다.

 

하물며 정치인의 부인역할은 오죽하랴. 대부분의 정치인 가족이 출마에 결사반대하는 이유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족이 감수해야 하는 내조의 길은 가혹하고 생색도 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한다.

그 힘든 일을 엘리자베스 여왕은 즐겁게 편안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선진국의 감추어진 원동력이다.

지겨운 외교를 낭만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스퍼스타급 외교달인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