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목사
조규남 목사

[고양일보] "상황논리란, '어떤 행위의 기준이나 원칙이 없이 상황에 따라 생각 또는 판단과 선택이 좌우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반드시 따라오는 논리가 바로 '감정 논리'이다. 감정논리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에 따라서 생각이나 판단이 좌우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허물이나 실수가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막상 상황에 부닥치면 인간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만 하는 사실과 진실의 행위나 문제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에 해당한다." - 파르헤시아(parrhesia) / Naver 180626

젊은 시절 한동안 '하얀 거짓말(white lies)'에 관한 주제를 두고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극심한 토론 논쟁을 벌인 기억이 있다. 하얀 거짓말을 용납하는 편의 논리 근거는 거의 상황논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상황이 그렇기에 부득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여 말한다. 그러면서 이로 인해 큰 피해를 끼치거나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뭐가 그리 문제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에 하얀 거짓말을 끝까지 반대하는 편에서는 성경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으로 맞선다. 거짓말은 악이고, 그것이 악이 분명할진대 희던 검던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현대처럼 변화의 속도가 급류를 타고 흐르는 시대에 2천 년 전에 발표된 원칙의 기준을 내세워 변화의 양상에 흔들림 없이 우뚝 제자리에 서서 독야청청 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러한 삶의 자세가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 풍조에서 복음이 복음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상황을 무시하거나 상황을 떠나 상황이 만들어 내는 숱한 문제들을 외면하고 무조건 원칙과 기준만을 주장하고 있다면 이는 근본주의적 아집이 아닐까? 인간이 처한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신도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 위에 내려와 인간이 겪고 있는 근본적 고통에 참여하여 십자가 죽음을 택했다면 우리도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신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가 아닐까?

최근 TV 프로그램의 주종을 이루는 것 중에서 남녀의 만남을 리얼하게 다루고 있는 것들이 많다. 어떤 프로그램은 4쌍의 남녀가 한 공간에서 '한 달살이'를 자치적으로 해가며 그 안에서 서로가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게 한다. 또 어떤 것은 아예 노골적인 표현으로 그 프로그램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 '결혼보다는 동거!' 우리의 정서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만 현 시대의 풍조에서는 53%가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호하고 있어 이러한 결혼 풍속도나 남녀 만남의 출발선이 이미 한 편으로 기울었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 비해 지금은 남녀의 만남이 자유스러워지고 또 서로를 향해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좋다. 그러나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비교 판단이나 결정은 더욱 혼란스럽게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어 예전보다 꼭 찝어 좋은 것이라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연애 자유시대에서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나 이미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풀어야 할 두 가지 선택의 과제가 남아 있다.

먼저는, 연애 대상과 결혼 대상을 구별하여 선택하는 경우이다. 이 목적에 따라 서로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진다. 연애 대상으로는 좋지만 결혼 대상으로는 맞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결혼 대상으로는 좋지만 연애 대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 연애와 결혼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애로부터 결혼까지 올라가면 가장 좋은 케이스가 될 것이지만 사실 현실의 흐름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흐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음으로, 연애든 결혼이든 두 종류의 타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역시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연애 감정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렵다. 이성적으로 계획된 감정이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위 수많은 TV 프로그램들은 내가 원하는 것에 구애받음 없이 답을 내준다. 결혼 생활을 재미는 없지만 안정된 기반 위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의 조건을 따지기 전에 당연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급물결을 타고 있는 시대 변화에서 올바른 분별과 판단 그리고 이에 따른 결정과 선택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시대가 처해 있는 상황 안에서 다양한 방법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모든 경계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회에서는 결코 절대 진리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이 상대적 가치관에 의해 움직여지고, 결국 이것은 그 상황에 따른 상황논리를 만들어 내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틀(frame)의 규정을 만들어 우리 삶의 지평에 혼선을 가져오게 한다.

진리를 말할 때 그 기준이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이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므로 감정의 변화에 의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 지향점인 사랑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라는 스캇 펙(Scott Peck) 박사의 말처럼 사랑을 감정에 두지 말고 의지에 두어야 한다. 상황논리에 맞춰져 있는 감정은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매우 유연한 유동성을 갖고 있고 그것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여 결정과 선택에 따른 우리 마음을 쉽고 편하게 해준다. 그리고 단번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내놓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선택된 것이기에 마찰이나 갈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감정이 아닌 의지의 문제로 사고의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것이고,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인생 여정은 '아직도 가야 할 길'(The load less travelled)을 가고 있는 길 위의 존재(Being on the Way)로서의 과정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면 그 사람, 그 사랑은 매우 희망적인 것이 된다. 여기에 인간의 슬픔과 고통이 있고, 지금 여기에 인간의 기쁨과 자유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상황논리에 의해 진리가 눌려 있기 때문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인간이 해결해 나가야 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저출산, 고령화, 동성애, 낙태와 안락사 그리고 자살과 목사의 이중직 등의 숱한 문제들이 인간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는 상황의 늪에서 인간이 발버둥치며 헤어날 길은 무엇일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논리의 늪에서 헤쳐나오기 위해서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우상들로부터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받기 원한다. 보라! 얼마나 많은 우상이 우리 옆에 포진하고 있어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얽어매고 있는지를... 겸손히 절대자 창조주 앞에 나아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형편없는 죄인인가를 고백하며 신의 자비와 도움을 청하는 대신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들이밀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바쁘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세상적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고자 발버둥칠수록 점점 더 어둠과 무지의 늪으로 빠져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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