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서사의 끝, 웃음 머금은 눈물로 화답하다(에피소드 1)
98년 서사의 끝, 웃음 머금은 눈물로 화답하다(에피소드 1)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06.17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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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욱 어르신 (1924년~)

70년을 아내와 키운 連理枝(연리지)

“우리 막둥이 정자, 큰놈은 미숙이, 둘째는 영옥이”

누군가가 나에게 며느리들 이름을 물었다. 이제 며느리는 없고 딸만 남았다. 스무 살 순자가 연지곤지 찍고 내 품에 안겨 새 각시가 된 지 까마득한 세월이 지났다. 70년. 한 사람의 기나긴 인생을 담은 시간이다. 그 깊은 세월을 아내와 둘이 걸었다. 두 손 잡고 작은 소로길(작은 골목길)을 지나서 우리 아이들과 같이 신작로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한때는 드넓은 바다 위를 헤엄치는 부레 없는 상어처럼 고단하기만 한 시절의 올가미에 갇혀 허우적거린 적도 있었다. 상어처럼 쉬지 않고 헤엄쳐야만 물밑으로 가라앉지 않는 그 날들은 기억의 저편에서 희미한 그림자만 남겼다.

이제 손을 뻗치면 바로 만져지는 우리 순자의 손, 내일모레 백 살이 되는 남자 곁을 아내가 지켜준다. 나만큼 행복한 남자를 몇이나 찾아낼까. 다 우리 각시, 순자 덕분이다.

우리 부부는 70년 묵은 連理枝(연리지)다.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한 나무처럼 70년의 세월을 묻었다.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사는 힘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반쪽짜리, 아내가 곁을 내주어야 비로소 우리가 된다.

네 탓을 하지 않고 당신 덕분이라며 살아온 그 세월은 짙은 녹음이 무성한 지금을 닮았다.

이 평안함이 내 것이라니. 오늘 점심도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먹고 창가로 찾아드는 햇살을 따라 졸음을 청하고 싶다. 졸음을 타고, 멀리 와 버린 내 고향 부안으로 가보자. 꿈결의 끝에서 그리운 이들을 만나고 싶다.

아, 어머니…. 작은 사내아이 정욱이가 되어 어머니 품에 안겨보는 그 꿈을 꾸고 싶다. 달그락거리는 아내의 설거지 소리를 듣고 낮잠을 물린다. 무릎을 '탁' 치며 혼자 읊조리겠지.

‘아, 여기까지 정말 잘 왔구나.’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아흔여덟 살의 남자, 자존심을 지킨 내 지난 삶의 단면이다. 인생은 거창해야 빛나는 것이 아니다. 숨결을 나눌 수 있는 그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 비로소 진짜다. 자, 이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이정욱 어르신 결혼식 사진
이정욱 어르신 결혼식 사진

열네 살, 겁 없는 무용담(관부연락선을 타다)

칠흑 같은 어둠 저 멀리서 깜박거리는 히로시마항의 불빛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열네 살 까까머리의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전북 고창 촌놈이 신태인역에서 출발해서 부산항의 관부연락선을 타고 드디어 일본에 도착했다.

1924년생인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에게 일본에 가야겠다는 겁 없는 통보를 했다. 호시절이라도 허락할 부모가 없을 텐데 일제강점기하의 엄혹한 여건에서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시고 내 손바닥에 100원짜리를 얹어주셨다. 내 손가락을 접어 100원짜리를 꼭 쥐게 하시면서 “잘 다녀오너라”

어머니는 큰 숨을 들이켜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셨다. 눈망울은 또랑또랑하지만 아직 어머니가 내려다봐야 하는 작은 키의 아이였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어머니께서 손에 쥐여주신 100원짜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무모한 그 길을 떠났다. 열네 살, 부안 시골 촌놈의 겁 없는 무용담이라고 치부하기엔 어린 나의 의지가 견고했다. 나는 일본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내 발길을 잡지 않으셨다. 나를 믿어주신 어머니. 그리움이 더 깊이 남을 수밖에 없다. 집을 떠나던 날, 내 등에 꽂힌 어머니의 걱정 어린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기 전, 일본 히로시마로 떠났다. 사촌 형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바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배짱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큰 딸도 나를 닮아 일찌감치 미국으로 가서 입지를 굳혔다.

일제강점기하에서는 운신의 폭이 작았다. 도항 증명을 내야 배를 태워주었다. 내가 일본에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었다. 도항 증명서 없이 일본에 건너가면 밀항이 된다. 도항 증명은 군내 경찰서장이 발행해주거나 동청회사에서 발행해주었다. 사촌 형이 동청회사를 다녔다. 동청회사는 농촌을 착취하는 회사였지만 그 시절을 살던 많은 사람이 양심대로 살아가기에는 우리 삶의 여건이 너무 척박했다. 우선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촌 형도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덕분에 도항 증명을 받아냈다.

“형님, 일본 갈랑께 도항 증명 하나 내주시오”

“정욱아 니 일본이 어디 붙은 줄은 아느냐. 째깐한 것이 겁도 없이”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고 싶소”

“그래 간도 큰 놈이네, 증명은 내주는데 반드시 살아 돌아 오니라.”

고창에서 배를 타러 부산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신태인에서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린다. 대전역에서 부산항까지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부산항에 도착해서 관부연락선 곤고마루호를 타고 히로시마항에 도착했다. 째깐한 것이 가방 하나 짊어지고 전라북도 부안에서 집을 떠나 3일 만에 일본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구겨진 종이를 펴고 형집 주소로 읽어 내려갔다. 물어물어 형 집에 도착했다. 형이 나를 보자마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안에 있어야 할 녀석이 일본의 히로시마 땅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3일 동안 완행열차, 덜컹거리는 버스, 3등 칸에 겨우 몸을 기대는 배를 갈아타면서 일본에 도착한 시골 촌놈의 꾀죄죄한 얼굴은 또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정욱아 어찌 된 거냐”

“일본에서 학교 다니고 싶어서 왔습니다.”

형님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를 집으로 들였다. 나는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불평등을 신랄하게 맛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조센징이 되어 무차별한 위협에 시달렸지만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하교 후 골목길에서 일본 아이들이 떼로 몰려있으면 간간이 얻어맞기도 했지만, 반드시 한 놈이라도 패주고 잽싸게 도망을 다녔다.

나보다 더 덩치 크고 힘센 놈한테 이기지는 못했지만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몸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서 위기의 순간을 잘 모면하면서 1년 가까이 일본에서 잘 버텨냈다. 어렵게 일본에 갔는데 일본은 내가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었다. 우선 내가 믿고 갔던 형님이 대학을 동경으로 가면서 나는 히로시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3일 걸려서 당도하는 머나먼 그 길을 열네 살의 꼬마가 혼자서 오고 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 품에 안겨보니 내 안식처는 역시나 어머니 품, 그리고 그 어머니 품을 오롯이 품은 고향마을이었다. 겁 없는 무용담을 열네 살부터 쓰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은 줄곧 거침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익숙한 것만 찾느라 망설이고 포기하는 거보다, 도전하고 치열하게 맞서 책임지는 인생도 살아볼 만하다.

몇 해 전 우리 둘째와 같이 열네 살의 그 기억을 찾아 히로시마에 다녀왔었다. 환갑이 지난 아들과 같이 80년 전 열네 살 소년이던 지난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 감회가 새로웠다는 보편적인 말로 그 감격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내가 복 많은 사람이라는 반증이었다.

거침없는 그 무용담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에 폭풍우가 몰려올 때는 雄志(웅지)를 품고 관부연락선 3등 칸에서 몸을 도사리던 열네 살의 정욱이를 늘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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