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소롯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무쇠 같은 남자①
인생의 소롯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무쇠 같은 남자①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1.09.25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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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손일등 어르신
손일등 어르신
1938년 손일등 어르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시 ‘곡강(曲江)’의 한 구절이다. 그때는 인생 70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에 백수를 넘긴다면 천하제일의 축복이라고 회자되었을 것이다. 104살의 어머니, 그 어머니와 봄날이 절정일 때 이별하신 손일등 어르신. 백수를 넘긴 어머니지만 떠나보내는 마음은 어떤 위로로도 달랠 수 없다. 여한 없이 모셨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더 잘해드리지 못한 마음의 빚을 탕감받기에는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 먼 하늘을 올려다보셨다. 눈물고인 눈동자 한가운데 분명 어머니께서 다소곳이 앉아 계실 것이다. 어머니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질세라 한참이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신다.


여든이 넘은 남자,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난 무쇠 같은 남자도 ‘어머니’라는 이름 앞

에서는 그저 작은 사내아이가 된다. 어머니의 치마폭이 아닌 어머니 가슴에서 뛰어놀고 싶

은 그 마음이 사정없이 파고들 때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어머니 먼 길 떠난 날 당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보았다는 어르신. 시시때때로 만났던 그 사람들, 그 일들을 회억하며 마음을 진정시켜보신다.

■ 그리움이 화석이 된 그 사람들
아내를 보내고 어머니를 7년간 모셨다. 아내를 보낸 허망한 가슴을 달래느라 어머니에게 더 깊은 마음을 드렸다. 3년 5개월 동안 아내 없는 빈자리를 지키며 어머니를 돌보았다.

남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한계가 있어서 나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기저귀를 때때로 갈아드리는 것도, 나의 무딘 손마디가 해내기에는 어줍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거동이라도 할라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결국,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되는 어린아이가 된 어머니를 나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그날을 만났다.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나의 나이든 몸과 기력을 청춘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몸은 요양원에 모셨지만, 발길은 내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한쪽 팔로 어머니를 감아 안을 수 있을 만큼 어머니는 여위고 사그라들었다. 하루하루 어머니의 숨소리가 낮아지면서 어머니는 그렇게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

2021년 4월, 104세 어머니를 떠나 보낸 날
2021년 4월, 104세 어머니를 떠나 보낸 날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맛보고 다시 봄날을 맞은 그 햇살이 따사로운 날에 멀리멀리 떠나셨다.

그리운 이들을 떠나보내는 날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아주 멀다.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그 이들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쉬운 마음자리에 모시고 아내는 죄스러운 마음자리에 묻었다. 4남매 중 먼저 간 우리 아들은 애통한 자리에 묻지도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날처럼 가혹한 날은 없다. 어느 누구도 그 시간을 피해갈 수 없다면 우리 인생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면서 지나온 그 길을 한번 돌아본다. 치열했던 젊은 날, 뜨겁게 사랑했던 청춘, 주름이 나이테가 되어버린 노인의 얼굴이지만 아직도 아이 같은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 청년기의 결핍, 인정으로 채우다

면 단위에서 모든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사람은 사실 드물다. 나는 그 흔치 않은 기록의 보유자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38년 1월 29일 태어난 나는 6남매로 자랐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장남 부채 의식이 있었다. 내 것을 모르고 자라던 어린 시절, 우리 6남매는 가난했지만 서로 정을 부비면서 부족함을 채웠다. 일등이 이식이 일선이 일수 기한이 이한이 종말이 얼마 만에 불러보는 우리 형제들 이름인지.

묘금리에서 청산중학교까지 30리를 걸어 다녔다. 새벽밥 먹고 책보를 둘러매고 학교에 가려면 2시간 넘는 시간을 걷고 또 걷는다. 하교 후 돌아오는 길도 걷고 또 걷는다. 저녁이면 지쳐서 돌아와 공부는 뒷전이다. 5시간을 왕복하는 거리, 돌도 씹어 먹을 때지만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기도 어려웠지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겨낼 장사가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고속도로 개통 후 1년 만에 전기가 들어왔다, 내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다.

이장을 보던 친구와 같이 한전 심천 출장소에 가서 읍소를 하고 전기를 끌어들였다. 학창시절에는 전기 구경도 못 했지만, 고속도로 개통 후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곳곳에 전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골마을들이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기 들어오는 날은 온 마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2년간은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아버님이 월사금 낼 돈이 없어 중학교에 바로 갈 수 없다고 하셔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어린 마음에 입술도 깨물어보고 애꿎은 물수제비도 떠보았다. 2년 후에 급우들보다 두 살 더 먹은 형님으로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형님들도 학교에 다니고 아이 업은 누이도 학교에 다녔다. 제 때에 제 나이에 인생의 단계를 밟는다는 건 그래도 살만하다는 반증이었다.

내가 나고자란, 그리고 내가 영원히 거할 내 고향의 마을경치
내가 나고자란, 그리고 내가 영원히 거할 내 고향의 마을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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