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소롯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무쇠 같은 남자②
인생의 소롯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무쇠 같은 남자②
  • 고양일보
  • 승인 2021.09.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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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손일등 어르신
1938년 손일등 어르신
1938년 손일등 어르신

옥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은 내 형편에 그림의 떡이라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했다. 청성면 소서리 사는 송순애를 중매로 만나 신랑 각시가 되었다. 아내는 이름처럼 예쁘고 순했다. 피 끓던 청춘, 순애는 내 마음에 불을 지펴 나는 색시를 품에 안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신혼의 단꿈에 젖을 시간도 없이 나는 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 혼자 조부모 시부모에 시동생들까지 거기에 농사도 손을 보태야 하고 21살의 여인네는 하루하루가 그저 고단하고 외롭고 힘들었다.

키 크고 훤칠했던 나는 헌병으로 차출돼서 강원도 양구 화천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21살의 젊디젊은 청춘에게 강원도 첩첩산중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강원도 화천은 지금도 하루를 써야 도착하는 거리인데 60년 전 옥천에서 화천으로 가는 길은 태평양을 건너는 것처럼 멀고 먼 길이었다. 휴가 한 번 나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첫 휴가, 화천에서 군용트럭을 타고 우리는 어둠을 뚫고 춘천역에 내렸다. 날이 밝아오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내린다. 이미 한나절이다. 용산역 출발 군용열차는 옥천을 지나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에 영동역에 정차했다. 새벽에 출발한 나는 이미 깊은 어둠에 불빛도 찾아보기 힘든 영동역에 내려서 청성 묘금리까지 걷고 또 쉼 없이 걸었다.

젊은 시절 모습
젊은 시절 모습, 치열하고 성실했던 촌부의 젊은 날


3시간을 걷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기 바짝 들었지만, 산속에서 서낭당을 지날 때는 뒷목이 쭈뼛하다. 산짐승의 포효소리도 간담이 서늘하지만 아내 만날 생각을 하면서 진정시킨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저 멀리 작은 불빛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내가 밝혀둔 호롱불이다. 깊은 밤, 아내를 한 번 안아보는 것도 꼬박 하루 걸린 그 고단한 여정의 황홀한 마무리였다. 나에게도 그런 청춘이 있었다니…. 이른 아침, 온 가족이 툇마루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었다. 다들 재빨리 숟가락을 놓고 할머니가 먼저 “00야 00야 마실 다녀오자”며 마당 한가운데서 집에 있는 조카와 동생들을 불러냈다. 아버님과 어머니도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셨다. 아침부터 다들 바쁘다. 시골의 일상이기도 했지만 모처럼 휴가 나온 내가 아내와 단둘이 회포를 풀 시간을 어른들이 배려해 주신 것이다. 못된 시어머니 같으면 둘이 있는 꼴을 못 볼 텐데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을 일부러 마련해주셨다. 아내와 정을 나누는 그 꿀맛 같은 시간을 가슴에 품고 나는 이른 점심을 먹고 아내와 눈도 못 마주치고 다시 군대로 들어갔다. 등에 꽂힌 아내의 아쉬운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 건실한 농사꾼으로, 마을의 위원장으로 허투루 살지 않았다

제대 후에 아버지 농사를 도와 새로운 영농법도 개발해서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농사박사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도열병이 한창이던 때라 벼가 튼튼하게 자라는 수확방법이 절실하던 때다.

농사만 지어서는 아이들 월사금 낼 때마다 전대를 뒤지고 또 뒤져야 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우리 마을 근방에도 고속버스 정류장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갔다. 아내가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뻑뻑한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닫는 구멍가게. 막걸리도 한 잔 마실 수 있고 요모조모 필요한 생필품들이 소소하게 구색을 갖췄다. 개인 차량이 없을 때라 대전 가서 물건을 뗀 후에 고속버스로 물건을 실어왔다. 1970년대는 고속도로 개통 후에 고속버스가 대중교통의 선진화를 이끌고 있었다. 당시 주름잡던 고속버스는 ‘그레이하운드’, ‘한진고속’ 등이었다. 고속버스가 묘금리에도 정차해서 가게 물건을 수월하게 날랐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에서 들어온 2층 버스로 화장실까지 갖춘 대단한 버스였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지금 스튜어디스처럼 미모를 갖춘 여인들이었다. 낑낑거리며 물건을 들고 오면 기사님들이 손을 보태서 차 트렁크에 짐을 실어주기도 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사람 냄새나던 그 시절을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다. 제사만 지내도 동네 사람 다 술 한잔씩 돌리던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한다. 묘금리도 80호 정도 적지 않은 마을이었고 내가 다니던 청산중학교도 운동장에 아이들이 꽉 들어찼던 호시절이 있었다.

나고 자란 마을 경치
나고 자란 마을 경치


한창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시골 마을의 취락구조 주택개량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나는 마을에서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집집마다 130만원 가량 보조를 해주지만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돈들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추진위원장인 내가 할 일들이 많았다. 취락구조 사업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동네는 길을 내게 된다. 취락구조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한동안 좁은 소롯길을 다녀야했을 것이다. 마을 이장도 보면서 우리 묘금리가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을 실천하는 역할을 해냈다.

아직은 4시에 거뜬히 일어나고 있다. 그때부터 움직여 7시 25분 첫차를 타고 복지관 노인 일자리 일터로 출근한다. 한창 수업을 많이 들을 때는 일본어 중국어 풍수지리학까지 배우고 싶은 것들을 죄다 배우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서 옥천 나오는 버스가 이런 저런 통로로 9개나 있다. 나이든 시골 노인이 무료하지 않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서 좋은 시절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다. 혼자만 누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아내 몫까지 알토란 같이 살아야 한다. 훗날 아내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날을 위해 나의 하루를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채워가는 중이다. 인간 속에서 부귀공명을 해탈하고 청정(淸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친필 글씨, 어머니 돌아가시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간략하게 적어본 나의 흔적들
친필 글씨, 어머니 돌아가시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간략하게 적어본 나의 흔적들

이백의 ‘경정산에 홀로 앉아’ 라는 싯구가 작금의 내 마음으로 스며든다. 소리없이...

이백 ‘경정산에 홀로 앉아’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진 푸른 하늘에

한 조각 하얀 구름 유유히 떠서 흐르네

서로 마주 보아도 물리지 않음은

오로지 경정산 너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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