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小木의 선물'-레나도의 고백②
'숲, 小木의 선물'-레나도의 고백②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12.3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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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결혼

배좌규 어르신 (1935~)

숲은 천이(遷移, 같은 장소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식물군집의 변화)를 겪으며 울창해진다.

小木이던 내가 꿈꾸던 숲은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따뜻한 가정이었다. 유년의 기억은 고단하고 고독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을 닫았다. 물론, 포기는 아니었다. 외아들이란 부채의식은 인생의 기회마다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길에 절망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착한 아내를 만나 7남매를 두었다. 중동 영성목공소, 7남매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36년간 내 청춘을 바친 목공소, 小木이던 난 솜씨 좋고, 지각한 번 하지 않았으며 믿음의 뿌리를 내렸다. 어려운 살림, 쉴 새 없이 손이 가는 7남매. 묵묵히 내조한 아내 덕에 아이들 육성회비 한 번 밀리지 않았다. 아버지로서의 내 자존심이었고 내 상처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다.

내 성장통은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면서 일단 멈추고 현실에 뛰어들었다. 대전에서 숙부님 내외분과 같이 지내면서 숙부님 일을 돕게 되었다. 숙모님도 어린 나이였는데 자식도 동생도 아닌 조카를 돌봐준다는 것이 여간 마음으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두 분께 잘하고 싶었다. 숙모님은 나를 거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아버지에게 내려가셔서 두 분을 설득해서 모시고 올라오셨다. 조카와 시숙 부부를 모시고 살겠다는 숙모님, 약관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속 깊은 마음이었다. 시숙을 모시고 사는 일이 시아버지 모시고 사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데 숙모는 거절하는 아버지에게 간청을 하다시피 하셔서 모시고 올라오셨다. 숙부님이 원한다 해도 숙모님이 거절하시면 그 가족이 함께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숙모님은 천사 같은 분이었다. 두 분은 대흥동성당에 다니셨는데 그 영향으로 나도 스물두 살에 영세를 받고 ‘레나도’가 되었다. 두 분의 귀한 섬김의 사랑이 성당에 알려지면서 나도 영세를 받으며 천주교 신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 인연은 천주교 신자인 아내와의 만남도 허락해주시는 귀한 인연의 고리가 되었다. 신실하신 숙모님은 우리 식구를 거두어 주시고 내 인생에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숙모님은 경제권도 우리 아버지에게 맡기셨다. 남편이 벌어온 돈을 시숙에게 맡기는 제수씨. 보통의 관계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들이다. 아버님은 가정에 살뜰하지는 않으셨지만 해외에서 사업도 해보신 분이라, 돈을 허투루 쓰지는 않으셨다. 금전보고서를 꼭 쓰셔서 숙부님 내외분에게 보여주셨다. 어쩌면 그런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었기에 같이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도 있었다. 나 또한 성실한 청년으로 내 입지를 굳혀나가고 있었다.

22살에 영세를 받고 하느님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님을 안다. 천주교 성인품을 가진 조상을 둔 아내를 만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하느님이 준비하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관계의 고리가 있다. 세월이 지나야 그 숨은 그림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우물에 가서 물을 긷고 나무도 해다 놓고 불을 지피는 일들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온 힘을 다하고 정성을 들였다. 숙부는 기관차 고치는 일을 하셔서 석탄 찌꺼기 중 연료가 되는 탄을 갖고 오셨다. 숙모님이 그 탄재를 연료로 쓰고 계셔서 내 딴에는 있는 힘껏 불을 붙여드리고 싶었다. 숙모님께 도움 되고 싶어서 부채질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팔이 아픈 건 당연하거니와 불이 너무 세게 잘 붙어서 양은 냄비가 그만 녹아내리기도 했다. 미련하리만치 우직하고 성실했던 그 시절 나의 단면이다. 신세진다는 생각에 몸을 편히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밥 지으시는데 불이라도 시원하게 때드린다고 공을 들이다보니 그 센 불에 솥이 내려앉았던 것이다. 다들 어이없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그 모습이 그때의 나였다. 가진 게 없었기에 더 성실하게 살았고 신세지고 싶지 않아서 뭐든 열심히 해서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었다.

대전에서 삶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나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바로 결혼. 숙부님과 아내의 작은 오빠가 조카와 여동생을 중신했다. 주천이 고향인 나는 그렇게 생면부지의 땅 대전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아내 스물둘 내 나이 스물여섯, 젊음과 성실함이 전부였던 나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지금 우리 집터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60년을 일궈온 뜰이다. 아버님을 모시고 시작한 아내의 시집살이는 고단했다. 워낙 까다로운 분이라 식사부터 여간 깐깐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7남매를 낳고 지금 집에서 여의살이(시집을 가서 사는 살림) 시키고 우리 부부가 노년을 보내고 있다.

小木이 만든 숲.

결혼 후에 목공소를 하면서 가정을 이뤘다. 36년간 목공소를 하고 은퇴한지 18년이 되었다. 중동의 영성목공소, 나의 분신이었으며 우리 집의 대들보였다. 아이들을 다 성장시키고 우리가 노년을 맞이하는데 큰 디딤돌이 되었다. 나는 역시나 또 성실한 소목으로 인정받았다. 결혼 전부터 목공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1살 때 목공소에 가서 일을 배워보고 싶다고 자진해서 시작했다. 어린 내가 일을 한다고 할 때 주인어른이 나를 믿지는 않으셨다. 작은 일부터 시켜보시며 나를 검증하셨다. 그 덕에 주변에까지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나중에는 목재 한 박스를 부탁하면 용달차로 하나 싣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를 믿는다는 반증이었다.

그렇게 목수 일을 배우고 목공소를 직접 하게 되었다.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때론 아이들을 앞뒤에 태우고 출근을 했다. 소박하기 짝이 없는 아침 출근길 모습이지만 아내가 싸준 도시락, 자전거에 태운 아이들, 열심히 돌리는 페달,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가장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려지는 것이 아닌 그 책임감은 오히려 나에게 희망이었다. 유년시절 내가 꿈꾸던 소박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목공일을 했다. 지금은 처조카가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 길에 목공소가 여러 개 있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나무로 직접 짜서 집안의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목수들에게 호황인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다카 하나 박아주고 15만원씩 받는 그런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망치에 손을 찧어가면서 못에 찔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손바닥이 목수의 훈장 같은 때였다.

수작업으로 선반이며 책상이며 옷장을 만들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학도병 시절엔 총에 맞아 눈을 다치고 목공일 하면서는 새끼손가락이 거의 절단될 위기에 놓였었다. 톱질하다 손가락이 다 잘리지는 않았지만 큰 상해를 입었다. 피가 잘 안통하고 겨울만 되면 시려서 쑤시고 욱신거리는 건 예사로운 일이다.

주변에도 성실한 목수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지만 일부러 단골 거래처를 따로 두지 않았다. 그때그때 주문이 들어오면 오늘이 마지막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못질 하나에도 혼을 실었다. 관공서도 내가 일부러 멀리한 거래처다. 관공서와 거래를 하면 공무원들이 뒷돈을 주고받는 것이 관행이던 시절이다. 거간비를 떼고 술 받아 주는 것도 일의 순서로 까지 생각하고 있다. 결국 제 살 깎아먹는 일이며 고스란히 손님들이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손님의 몫이다. 가격이 올라가거나 싼 목재를 사서 비싼 재료라고 속이는 것 밖에는 답이 없게 된다. 난 그런 거래가 싫었다. 깐깐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보여도 상관없었다. 내 할 일만 잘하면 되지 굳이 술 받아주면서 일감을 따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구차하게 하지 않아도 내 손맛을 본 고객들은 나를 찾았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 주는 건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먼저 안다. 나는 그런 자존심 있는 목수이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 그 영성목공소를 통해서 공부하고 결혼하고 다 사람구실을 시켰다. 그럼 됐지 뭘 더 바랄까, 내 자존심을 지키고 내 재능을 마음껏 썼다. 아쉬울 게 없다. 큰 딸 시집갈 때 이삿짐 나르는 분이 책상을 들면서

“아니 무슨 책상이 농짝 같아요. 왜 이리 무겁죠? ”

그건 바로 목공일을 하는 나의 철학이었다. 나무를 아끼지 않고 눈속임도 없다. 정확히 썼다. 그래서 내가 만든 가구들은 무거웠다. 작은 가구 하나도 낑낑거리며 들어야 했다. 좋은 목재로 정성을 들여서 무겁고 투박하지만 오래 쓸수록 더 귀한 가구로 빛이 났다. 내 자존심도 그렇게 묵직했다. 우리 아이들은 아무도 목공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처조카가 그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오랜 기간 터를 닦았고 이젠 그 명맥은 오히려 조카가 이어가고 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보물 같은 집이다. 어디서 도심 한복판에서 목공소를 볼 것인가! 이젠 오래된 유적지처럼 되어버렸지만 지난 우리 삶의 현장이다.

아이들 키울 때 가끔씩 목공소에 놀러오면 브라보콘 하나씩 사주곤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래된 영화필름을 돌리는 거 같다. 대패질하는 땀 흘리는 아버지, 브라보콘 한입씩 베어 물고 입술을 타고 내리던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천진난만한 우리 아이들. 그렇게 소박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모습을 우리 부부가 보여줬는데 우리 아이들이 딴 길로 갈수가 없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다. 내가 소목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열매들이다. 36년간 목공일을 정리하고 잠시 휴식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한 번 나를 단련시키는 기회가 찾아왔다. 통상 기회는 좋은 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지만 난 그 때를 기회라고 회상한다.

가족들과 함께
가족들과 함께

후두암, 암이 너무 많아서 흔한 병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의 일이 되고 가족의 일이 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두렵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학도병시절 총기오발사고로 눈을 다친 것처럼 또 성실하게 살아왔던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빛 잘 드는 예쁜 집에서 아내와 해로하는 이 일상은 천금 같은 기적이다. 동생 잃고 엄마마저 잃었던 그 지독한 고독을 견뎌내야 했던 7살 좌규, 지금은 여든이 넘어 그 폭풍우가 지나고 무지개가 뜬 따뜻한 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우리 삶이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아내와 손잡고 ‘그 날’까지 함께 하고 싶다. 평생을 내 곁에서 나를 지켜준 아내, 박애일 여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무지개 뜨는 집, 우리 7남매의 역사가 흐르는 집이다.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했던 따뜻한 추억들을 마음에 담아 하나씩 꺼내보며 나의 하루를 시작 하고 닫으련다.

매일 감사를 놓지 않는 레나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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