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희 어르신 (1930년~)

도오조데스 (도청입니다).
열여덟 살에 나는 도청 교환수였어.
격동의 세월 90년은 파란만장했지. 국민학교 졸업하고 처음에는 열네 살에 우체국 교환수로 일했는데 그때는 고향 소꿉놀이 친구들과 떨어져 있는 것만 너무 속상했어. 그런데 나중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교환수로 근무한 것이 나를 살린 것을 알았어. 주말에 시골집에 올 때마다 아랫마을 정순이가 안보이고 다음번에 가면 뒷집 언년이가 일본 유곽으로 끌려갔다는 거야. 그 기막힌 사연은 내 어릴 적 동무들이 바로 정신대에 끌려간 거였어. 나는 교환수로 근무 중이라 정신대에서 제외됐었지. 키가 자라면서 해방을 맞고 어른이 되면서 6.25를 만났어. 매일 살얼음판인 그 시절을 지나 어느새 아흔이 넘은 호호백발이 됐지 뭐야.

천정희 어르신
천정희 어르신



기구한 운명의 어린 여자 언년이


이원국민학교 22회인 나는 국민학교 졸업하고 겨우 열네 살에 작은 아버지가 우체국 교환수로 취직을 시키셨다. 150센티도 안 되는 작은 여자아이가 교환수로 앉아 일을 배우려니 좀이 쑤시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더더군다나 다 일본말이니 답답하고 힘들었다.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일주일 내내 참았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원역에 내려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작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투덜거리며 다니던 길이지만 이내 작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친구들의 아픔을 통해 알게 됐다.
작은 아버지는 나를 정신대에 안 보내려고 교환수로 취직시킨 것이었다. 도청 교환수로 3 년 근무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신대에 간 친구들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16살에 해방을 맞이했다. 밤에 공습 비행기가 뜨면서 굉음을 내고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는 사이에 밖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야심한 시각이라 큰 애기들은 담장 너머로 구경만 했다. 동네 청년들이 돌아다니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 물결로 사람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집안 어딘가에 태극기를 숨겨놓고 살았던 거다. 독립운동가의 대열에 들어서지 못했어도 집 안에 꽁꽁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보면서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해방의 기쁨에 취해있었지만 정신대로 끌려갔던 동무들은 고향으로 오지 않았다.
“언년이 청산에서 봤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찾아가보고 싶었지만 나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고향이 너무 그리워서 고향까지 왔다가 차마 이원에는 오지 못하고 서글픈 세월을 보낸 동무들이 있었다. 어디서 누구를 봤다는 얘기를 들으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친구들이 그 설움과 억울한 심정을 고스란히 감당하려니 평생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기가 막힌 그 세월 속에서 우리 양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애통했다.


시대의 아픔이 낳은 또 한 사람, 기구한 운명의 젊은 남자


90년을 넘게 살았다. 인생의 여정 중에 기막힌 운명의 사람들을 간간이 만나고 보았다.
해방되고 이원국민학교에 서울사범 나온 총각 선생이 발령을 받아왔다. 나는 이원국민학교
22회다. 시골학교로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였다. 우리 때 대흥국민학교 지탄국민학교
이원국민학교가 있었는데 대흥과 지탄은 학교의 명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폐교됐다.
아이들이 없으니 폐교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람 무덤에 비석처럼 학교의 비석인 교적비만 쓸쓸하게 남았다. 동네에서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들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약관의 그 서울 선생님을 동네 아가씨들이 다들 흠모했다. 그 선생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붙잡혀가게 되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 학교에서 바른말 좀 하는 선생들은 모두 좌익이라는 이름으로 단죄의 명단에 올렸다. 그 선생도 그러한 이유로 청주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1년 후에 석방됐다. 수많은 사람이 그 사건으로 학살을 당하는 등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원혼들을 어찌 달랠지. 그분은 석방된 후에 이원 집으로 돌아오던 중 배가 고파서 신작로에서 팔던 인절미를 사먹고 급체를 했다. 피난 떠난 마을이라 인적이 드물었던 빈집에서 혼자 사경을 헤매다가 그 동네 이장이 발견했다. 인적사항을 물으니 숨을 할딱이며 이원 누구네 사람이라고 겨우 한마디를 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분은 그렇게 비명횡사를 하셨다. 스무 살 갓 넘은 꽃 같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도 모자라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젊은 나이의 기막힌 죽음도 보았고 그 모진 세월을 다 살아내고 아흔이 넘는 우리도 있다. 우리의 목숨이나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골목골목마다 절감을 하면서 살아왔다.

운명의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해


결혼 후에 나는 남편과 이원에서 미곡 상회를 했다. 전쟁 후라 쌀장사는 호황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남편은 전대를 차고 다니며 여기저기 사무가 바빴다. 어느 날 남편이 전대를 잃어버려서 동네 동생이 남편 전대를 찾아준다고 3키로나 따라가서 전대를 찾아주었다. 그 안에는 당시 통용되던 빨간 색 오천원권이 수북이 들어있었다. 만원권이 없던 시절이라 5천원이 가장 큰돈이던 시절이었다.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던 시절이라 그 동생도 전대안의 수북이 쌓인 돈을 보고도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은 다들 가족처럼 살던 인심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그때는 다들 가난해도 오히려 인심이 후했는데 지금의 세태는 가진 것이 많아도 인심을 나누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 동생은 지금 노인회장일을 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형제처럼 보내고 있다. 가끔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옛날의 돈 잘 벌던 그 시절을 들춰주어 나를 또 감회에 젖게 한다. 나이들어 인생이 서글프다고 생각되면 오래전 기억 속에서 좋은 추억을 꺼내면 마음의 위로가 된다. 젊은이들이 노인네들은 옛날이야기나 한다고 핀잔하지만 그 오래전 추억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들도 나이 들어 보면 우리 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학습으로 알 수 없는, 반드시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바로 나이들은 설움을 알려면 그 나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순간순간을 열심히 아름답게 잘 살아야 한다.
내 형제는 8남매였는데 다들 세상 떠나고 여동생 한 명이 인천에 살고 있다. 여동생도 90이라 우린 둘 다 아흔이 넘었다. 가끔 통화할 때마다 동생은 아프다는 소리가 전부다. 당연한 것이지만 서글프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르신 연세가 믿어지지 않아요. 너무 고우셔요.”라고 칭찬해주면 웃음으로 반긴다. 걸어 다니는 것도 감사한데 곱다는 소리까지 들으니 마냥 좋다. 내가 이 나이까지 살 줄은 짐작도 못했지만 아직도 외출할 때면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진다. 내가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오래전 먼저 떠난 깊은 인연의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길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