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좌규 어르신
배좌규 어르신

배좌규 어르신 (1935~)

숲은 천이(遷移, 같은 장소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식물군집의 변화)를 겪으며 울창해진다.

小木이던 내가 꿈꾸던 숲은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따뜻한 가정이었다. 유년의 기억은 고단하고 고독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을 닫았다. 물론, 포기는 아니었다. 외아들이란 부채의식은 인생의 기회마다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길에 절망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착한 아내를 만나 7남매를 두었다. 중동 영성목공소, 7남매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36년간 내 청춘을 바친 목공소, 小木이던 난 솜씨 좋고, 지각한 번 하지 않았으며 믿음의 뿌리를 내렸다. 어려운 살림, 쉴 새 없이 손이 가는 7남매. 묵묵히 내조한 아내 덕에 아이들 육성회비 한 번 밀리지 않았다. 아버지로서의 내 자존심이었고 내 상처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미옥 성옥 태옥 영옥 주옥 서옥 금옥

이름만으로도 명치끝이 아리는 우리 7남매. 예순이 넘어 평화롭던 일상에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후두암, 생과사의 혼란스러움에선 어느 누구도 의연해지기 어렵다. 감사를 배우며 완치되고 회복되었다. 아내와 노년을 보내며 며느리들에게 전화를 먼저 돌릴 수 있는 사랑의 용기까지 생겼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닫는 나, 레나도!

유년의 내 고독은 천이를 이뤄 가족이 주는 아름다운 숲에서 숨 쉬고 있다. 내가 만지며 숨을 불어넣었던 그 나무가 이룬 숲이다. 인생, 고맙고 행복합니다. -레나도의 고백-


학도 의용군 총기사고, 평생 운의 반을 쓰다.

외로웠다. 유년의 기억들은 어린 동생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세상에 대한 큰 야망, 할머니 손에 새어머니 손에 성장해야 하는 운명. 말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숨이 찼다.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 26살에 어린 아들의 죽음을 맞은 애통함을 못내 이겨내지 못하시고 마음의 병환으로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다. 아버지는 가정보다 세상에 대한 꿈이 더 크신 분이라 어머니의 애통함을 보듬기에는 마음의 간극이 너무 컸다.

착한 아이였지만 마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던 나의 중학시절. 기막힌 운명의 장난과 한 번 더 싸워야 하는 죽음의 그림자와 만났다.

학도병, 방과 후 총 손질을 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펑....총소리에 다들 혼비백산하여

“악!!”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소리, 내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는 선혈. 난리법석인 급우들을 등진 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선배의 총기 오발사고였다.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그 와중에 비참하리만큼 처절한 내 운명이 가엾기보다 오히려 지겨웠다. 어른들이 주고받는 얘기들이 어렴풋이 들렸다.

“뇌에 총을 맞았어요, 눈을 스쳤는데 실명은 되지 않을까요? 뇌에 맞았으니 만에 하나 살아도 정신이 온전치 못할 텐데요.”

아, 정신은 혼미하지만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오는 어른들의 절망스런 이야기들, 어린 나에게 운명은 너무 가혹했다. 나를 염려 하는 어른들의 소리는 아득히 멀어져 가고 아른 거리던 병원 천장의 불빛도 희미해져갔다. 그 후로 나는 나흘 만에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희미한 그림자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츰 선명해지면서 아버지 할머니 그 선배의 어머니, 선배 얼굴이 하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배도 그때 열일곱 살, 그 두려운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작은 소년이었다. 눈을 떠보니 선배가

“좌규야 괜찮아 나 보여? 너 살았구나. 살았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선배는 어쩔 줄을 몰랐지만 내가 살아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좌규야 총알이 천만다행으로 뇌막을 안 건드리고 눈 밑에 뼈 만 깨졌단다. 너 살았다 이제”

듣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평생운의 반을 쓰며 기적처럼 살아났다. 붕대도 안 풀고 1.4후퇴를 맞이했다. 파란만장만 내 인생은 그렇게 인생의 한 페이지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었다. 16세, 물론 당시를 살았던 우리 나이의 청년들이 격동의 시대를 거쳐 굴곡진 삶을 어릴 때부터 살아야 했지만 유독 나는 어린 시절이 더 참담했다.

영성목공소
영성목공소

장남 부채의식, 아메리칸 드림, 좌절

살면서 어머니가 아닌 여자 손을 열 한명을 거쳤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어머니 할머니 새어머니 숙모 아내, 물론 아내의 손길이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건 두말 하면 잔소리다. 나 역시 청년기에 이미 우역곡절의 삶을 살아서 오히려 나이 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맞설 때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저력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집안을 책임져야하는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가 계셨지만 아버지는 가정을 건사하는 일 보다는 당신의 야망이 더 크신 분이었다.

나는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를 하면서 집안을 도왔고, 코리아타임스의 급사로 일하기도 했다. 뭐든 주어진 일은 책임감 있게 해냈기에 윗분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 나에게 인생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나를 괴롭혔던 그 편치 않은 집에서 당당한 명분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코리아타임스의 간부가 미국으로 들어가면서 나에게

“좌규, 미국으로 같이 갈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미국, 아메리칸 드림.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당연히 갈등이 생겼다. 떠나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운명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난 꿈을 접고 말았다. 물론 인생에 대한 포기는 아니었지만 미국까지 가기에는 나를 가두고 있던 장남이라는 굴레가 너무 두터웠다.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집안의 장남인데 타향도 아닌 타국으로 떠난다는 건 사실 아버지와의 절연이었다. 결국 나는 시도하지 못했다. 장남이란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문득, 우리 장남, 큰 아들이 서울로 학교 가려다 형편이 안 되서 지방 국립대 가라고 했더니 3일간 입도 안 뗐던 기억에 미안한 마음이다. 충대 전자과에 수석으로 들어가서 4년 장학생으로 평점 4.3점을 받았다. 카이스트 전자과 박사학위 후에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서울 일류대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 마음도 자기 속만큼 타들어간다는 걸 이젠 알 것이다. 장남이라 집안의 형편에 양보하는 아픔을 겪게 했다.

잘 먹이지도 잘 입지도 못했던 아이들. 고등학교까지만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본인들이 알아서 성장한 우리 아이들. 내 자랑이며 고마운 나의 은인들이다. 내가 신문사에 근무할 때 월급타면 1원도 안 쓰고 집에 가져다 드렸던 내 소신이 아이들에게도 대물림이 되었다. 부산 영도다리에서 서면까지 걸어서 집에 갔다. 월급 1원도 축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독하게 살았다. 과연 그것이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만 있었을까.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이 학창시절을 보냈듯이 나에게도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향학열에 불타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코리아타임스에서의 미국행은 불발로 끝났지만 기회는 또 찾아왔다. 미국으로 갈수 없던 그 때, 코리아타임스의 업무부장으로 있던 김자혜 선생님이 나를 부산 공업학교에 추천해주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좌규야 공부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머리도 좋고 성실하니까 공부해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부산 공업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김자혜 선생님은 단순히 학교를 추천하는 그 이상의 인생에 기회를 주셨다. 나에게 큰 은인이셨다. 입학성적이 좋아 처음 학생과 교사 상견례자리에서 담임선생님이

“배좌규는 급장하고 누구는 부반장이다”

생각지 않은 말씀에 어리둥절했지만 내가 입학성적이 제일 좋았다. 이제 공부의 꿈을 펼치겠다는 부푼 희망도 있었다. 살면서 내 가능성을 발견해주고 가야할 길을 모색해주는 귀인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형편상 학교는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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