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옥 어머니 모습
최연옥 어머니 모습

[고양일보] 어머니는 애창곡인 백설희 님의 ‘봄날은 간다’를 술술 실타래 풀어내듯 불러주셨다.

이젠 한 음 올리기도 어려워서 전처럼 간드러지는 육성으로 노래를 할 수 없지만

평생 내 마음의 노래였다고 눈에 이슬을 촉촉이 머금고 말씀을 건네주셨다.

덧붙여서 어쩌면 노래 구절도 우리 인생과 닮지 않았소? 하시며 한 소절 한 소절 정성껏 들려주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애기씨에서 억척스런 엄마로 거듭나기 “생선사세요”

나는 연분홍 치마 날리며 곱게만 살 줄 알았던 아가씨에서 억척스런 아줌마로 변해갔다.

훈장이 된 거친 손
훈장이 된 거친 손

줄줄이 5남매를 키워야 했고 남편은 뭘 한답시고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알맹이는 없고 갈수록 몸과 마음이 폐허가 되어가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남편이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남편의 사상누각은 계속 허물어져 갔다. 남편도 유복한 집에서 고생안하고 자란 사람이라 어려운 여건에서 다시 회복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70년대는 한창 건설경기가 활황이었을 때라 고속도로 위에서 땅이라도 파면 식구들 밥벌이는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도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라 그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던가.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던지 머리를 쓰던지 그조차 안 되면 쪽잠을 자면서 부지런이라도 떨어야 한다. 대가 없이 얻으려는 그 자체가 화를 불러일으킨다.

남편의 행색이나 행태가 애들한테도 본이 안되서 나는 남편을 없는 셈 치니 차라리 속이 편하고 오히려 나를 다시 다잡게 되는 힘이 되었다. 나는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기가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 생각하면 내가 신세타령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보은 장날 나가서 생선을 떼서 다라에 이고 골목골목을 다녔다. 아직 젊고 곱던 때라 얄궂은 남정네들이 농담도 걸어오고 과수댁이 혼자 아이들 키우는 줄 알고 돈 많은 늙은 홀아비 중신한다고 한마디씩 하는 것이 내게는 고마움이 아니라 다 비수로 꽂혔다.

저녁 무렵이면 남의 집 담장을 넘은 된장 냄새가 내 코끝에 머물면 온갖 설움이 밀려와서 나로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생선사세요‘’ 소리가 목구멍에서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옷 보따리 들고 다니며 보부상을 하던 어른이 새댁 안쓰럽다고 당신 일 인양

‘’생선사세요‘’를 동네가 떠나가라 외쳐주셨다.

동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와서 생선을 사가면 한 다라가 뚝딱 사라졌다.

은인이다. 생명의 은인, 내 자존심의 은인이며 우리 아이들한테 은인이신 분이다.

남은 생선이라도 그냥 드리면 세상에 거저가 없다시며 꼭 돈을 내고 생선을 가져가셨다.

종이돈을 전대에서 꺼내셔서 꼬기작 꼬기작 구겨진 돈을 하나씩 쫙 펴서 돈을 주셨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가는 인연들이지만 단 한 사람이 나의 생명을 살리고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때는 종남이 어머니가 나를 살리셨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나는 해마다 산소에 들렀는데 이제 나도 거동이 여의치 않아 나 묻을 자리를 찾아야 하는 여건이니 무심한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 나의 봄날은 가고 있는가

보따리 장사를 전전하던 나는 돈을 모아서 시장에 손바닥 만한 생선가게를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 물 좋은 생선으로 성실하게 장사하면서 단골들이 모이고 나는 제법 돈을 만지게 됐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남편 없이도 5남매 고등학교까지는 육성회비 한 번도 안 밀리고 보낼 수 있었다.

동아전과, 표준전과 하나도 부족하지 않게 해줬고 비록 나는 생선 머리만 먹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통통한 살을 발라서 먹였다. 아이들은 내가 생선 머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겠지만

누가 통통한 살집을 마다할까.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우리 새끼들 주둥이에 살 발라 넣어주면 안 먹어도 배부르고 보기만 해도 배가 차오르던 때였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우애 있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큰딸은 고등학교 나와서 학교 서무과에 다니다가 성실하고 조신해서 교장 선생님이

조카며느리 삼고 싶다며 중매를 해서 보은에서 중학교 선생 하던 사위와 결혼을 했다.

큰딸이 살림 밑천 노릇을 하니 동생들도 평범하지만 무탈한 길을 걸었다.

남편이 수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어느 날 몸이 반쪽이 돼서 집에 찾아 들었다.

힘 좋을 때는 여기저기 다니면 마음대로 살더니 기력 떨어지고 갈 곳이 어디 있으며 누가 받아줄 것인가 집으로 기어들어와 나는 마지못해 받아주었다.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집에서 편하게 지내더니 또 슬금슬금 콧바람이 들어 다시 집을 떠났다. 그리고 1년 후에 다시 돌아왔다.

나는 불쌍한 인생이라고 측은지심으로 다시 받아주었다. 남편은 어느 날 속이 매스껍다면서

구역질을 해대더니 피를 한 바가지를 쏟았다. 죽을병이 걸려 집에 온 것이다. 식도암이 걸려서 집으로 온 남편, 아이들은 아버지를 용서 못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연민의 정이 남아 그의 마지막을 거두었다. 결국 내 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인들 그리 살고 싶었겠나 그 많은 전답 다 팔아먹고 인생무상을 느꼈겠지. 많은 여자 치마폭에서 허둥거렸지만 자기 몸 하나 누일 곳은 어디에도 없던 것이다. 평생 남자다운 남자로 살아보지 못한 남자, 아버지 그늘에서 먹고 살고, 마누라 품에서 또 안위를 찾던 안쓰러운 인생이지만 어쩔 것인가...측은지심으로 다 상쇄시켰다.

이제는 화가 끓어오르는 일도 없으며 딱히 기쁜 일도 없다. 일희일비의 쌍곡선을 그리던 때도 있었지만 이미 그 감정의 포물선은 마침표를 찍은 지 오래다.

나도 백설희 님의 노래처럼 내 인생의 봄날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연분홍 치마 자락 휘날리던 어여쁜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행복하다. 그리 곱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니...

작은 추억 하나만으로도 나이 든 나의 한순간이 보물 같다.

아픈 기억보다 붙잡고 갈 추억이 있어 서글프지 않은 노인의 시간이다.

귀하고 곱던 나의 봄날을 찾아가 본다. 어디쯤에서 어여쁜 나를 다시 만나게 될까?

아 꿈같이 지나온 시간, 돌이켜보니 그저 아름답다. 봄날이 가고 있구나!

내 손으로 담아주는 된장
내 손으로 담아주는 된장

큰딸 편지...

엄마!

엄마가 즐겨 부르시던 ‘봄날은 간다’를 저도 흥얼거리는 나이가 되었어요.

저도 할머니가 되었네요.

어릴 때는 고생하는 엄마를 보면서 저러다 엄마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우리를 두고 도망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가슴 조리던 날들이 있었어요.

생선 장사하는 엄마가 자랑스럽지 않았던 정말 부끄러웠던 제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할 뿐이에요.

그렇게 고생만 하던 엄마.

이제 엄마의 자손들이 다 모이면 스무 명이 넘네요.

엄마가 천군만마 같다고 하시는 엄마의 아들, 딸 그리고 사위 며느리

손녀 손자.

다 엄마 편이에요.

엄마 정말 감사해요

돌아가시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그리고 우리 두고 도망가지 않아 주셔서.

엄마 덕분에 나도 좋은 남편 만나서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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