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일보]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나올거요” 라고 우리 어머니들은 주저 없이 말씀하신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생을 드러냄이 아니다. 인생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하고 한고비 넘겼더니 다시 또 산 넘어 산을 만나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다들 살아오셨다.

그래서 한마디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될 법하다고 스스로 자평하신다.

진경숙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또한 책 한 권으로 부족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진신자로 태어나 지금은 진경숙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께서 신자에서 경숙이 되기까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한 많은 세월, 이제 격랑의 파도를 헤쳐 나와 항구에 정박한 고요한 배가 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4대가 10분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진경숙 어머니의 가족들. 시골에서도 흔치 않은 가족 구성원인데 도심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 향기로운 가족의 대들보인 어머니의 80여년도 파란만장이라는 이름으로 굴곡진 인생사를 담을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생, 큰 따님도 손주를 본 젊은 할머니다. 4대를 이루는 동안 어머님도 80여년, 질곡의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 열아 홉 살, 영도 시네마 극장에서 영화처럼 남편을 만나다.

전쟁고아가 될 뻔한 내가 차복남 어머니를 만나 궁핍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 또래 아가씨들보다 세상 물정을 알아차릴 경험을 두루두루 하면서 큰 애기로 성장해갔다.

큰아버지는 현금이 많아서 여기저기 거래처에 돈을 대주고 매일 수금을 하셨는데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눈치도 빨라서 내가 적역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장부를 들고 거래처를 다니면서 매일 수금을 했다. 극장이 전성기였던 때라 몇 개의 극장도 거래처였는데 영도 시네마 극장에 매일 들렸던 나는 수금할 때까지 시간이 남으면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곤 했다.

당신 전옥, 최무룡 등 당대의 내 노라하는 배우들이 영화관을 압도했는데 전옥 배우의 ‘눈내리는 밤’ 최무룡의 ‘외나무다리’ 등 그 시절 흑백영화는 열아홉 살 아가씨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그때는 사는데 궁핍하지 않아서 목걸이며 반지 예쁜 치장도 하고 한껏 멋도 부리던 예쁜 아가씨였다. 어느 날 영화를 보는데 뒤에서 남자가 장난을 걸었다. 누군가 돌아보다 어두운 극장 안이라 화들짝 놀랐다.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젊은 호기로 살던 남편이라 믿음직한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따끈한 연애는 시작되었다. 네모난 얼음에 팥을 삶아서 넣은 아이스크림이 인기였는데 우리는 석빙고 집에서 만났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남편은 세 번 만나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노래 가사처럼 열아홉 순정을 받쳤는데 떠나버린 것이다. 데리러 온다는 말을 철통같이 믿었고 남편은 그 말을 지켰다.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편지를 날마다 보냈다. 나도 그리움으로 적셔진 답장을 매일 보냈다.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어느 날 편지에 “신자야 올라 와라”했다.

■ 결혼, 사랑의 종착역이 아닌 고생문으로 들어서던 길

나는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야반도주하듯이 옷 보따리를 2층에서 내 던지고 큰집에서 밤에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사랑을 찾아 그 밤에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퇴계로에 살던 남편은 친구와 함께 마중 나왔고 운명처럼 다시 만났지만 나는 고생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위안이 되었다.

변변한 일을 하지 않던 남편의 집으로 갔더니 식구들이 색싯감 왔다고 쪽방에 다들 모여 있었고 온 식구가 모여서 쪽방에서 칼잠을 자는 형국이었다.

부산 영도에서 편하게 살던 나는 가난이라는 올가미에 갇혀 그야말로 고생문에 들어섰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화의 물결을 타던 때라 맘만 먹으면 일 할거리도 많았지만, 남편은 철없던 시절, 남 밑에서 순종하면서 일할 수 있는 근성이 부족해서 도로공사 아스팔트 까는 현장에 취업했지만 일을 쉽게 놓고 말았다.

그 틈에 아이도 생겼지만, 먹거리조차 제대로 없던 때였다. 차복남 어머니가 알게 되시고 어느 날 오셔서 사는 꼴을 보시더니 당장가자고 내 손을 잡아끄셨다.

어머니가 곱게 키워주셨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지는 말하면 무엇할까. 지금 6남매를 두었지만 나도 첫 아이를 잃은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 때 다들 7남매 8남매씩 낳고도 한둘 잃는 일들이 다반사지만 너무 힘든 시기에 아이를 잃어버려서 가슴에 묻으려니 애간장이 끊어졌다.

■ 하루도 쉼 없던 날들

내 인생도 전쟁고아로 시작되었기에 호적도 바로 잡아야 돼서, 애를 들쳐 업고 부산까지 다니면서 신자에서 경숙으로 개명도 하고 매일 발을 동동 구르면서 살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냈다. 우리 큰딸 윤형이가 나 따라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늦게 철든 남편 챙기랴 6남매 챙기랴 수많은 이야기를 다 쏟아내려면 책 한 권으로는 택도 없는 인생 여정이다.

남편은 본성이 착한 사람이라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우리는 서로 애를 태우기도 했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서 미군부대에서 미장일을 하고, 나도 요꼬를 짜면서 생활에 보탰다. 동두천, 파주 등에 살다가 당진으로 내려와서 30년 정도 살고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 인생의 사계 중 겨울을 맞은 우리 부부, 혹한이 아닌 눈꽃 핀 겨울

당진은 서해 바다가 좋은 곳이라 가족들끼리 단골배를 타고 나가 회를 떠서 먹기도 했는데 바다에서 갓 잡아 올려 회를 뜨면 말 그대로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날도 가족들같이 나들이를 나간 날이었다.

남편이 어지럽다고 전조증상을 호소했고 우리는 바로 119를 불러서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거동은 불편하지만 자리 보존하고 눕지 않게 되었다.

내가 부축하면서 살살 움직일 수 있고 나는 힘들지만, 우리 부부 정은 더 깊어졌다.

전쟁고아로 시작해서 열아홉 살에 철부지 같은 남편을 만나서 젊은 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던가!

친구들이 남편 얼굴도 안보고 결혼하던 때 세상 구경도 하면서 문리가 트이고 남편을 만나 불타는 연애를 하고 결혼했으니 나도 후회는 없다.

이제 내 인생 사계 중 겨울의 시간이지만 혹한이 아닌 하얀 눈이 나뭇가지에 솜털처럼 내려앉은 겨울이다. 살을 에는 추위가 위협하는 겨울이 아닌 눈꽃이 핀, 아름다운 겨울의 한복판에 섰다.

우리 큰 딸의 손주까지 4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름다운 그 숲속에 나와 남편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 가족이 그리는 겨울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그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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