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인(無名人)의 발자취
무명인(無名人)의 발자취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09.24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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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순(1938~2018)
故 용정순 여사(1938~2018)

용정순(1938~2018)

그녀의 이야기는 2018년(81세) 8월 이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고운 어르신은 천상여자로 살아오셨다. 일곱 살에 해방을 맞고 이후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에 항상 서 계셨던 분이다. 물론 기억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금촌에 살았던 4년이 어르신 인생에 가장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하셨다.

그리운 이름들 삼천포 금촌

삼천포(사천)제일 사진관에 자매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스물네 살 때였다. 시집 갈 날을 받고 동생 계순이와 견 포플린 원피스를 차려 입었다. 한껏 멋을 냈지만 표정은 얼음처럼 굳었다. 고대기로 말아 올린 머리에 뺨이 발그레했던 정순이와 계순이는 눈이 부시게 예뻤던 경상도 가시나들이었다. 그 이후로 60년 동안 계순이와 단둘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1930년대 태어난 여자들의 일생이다. 경상남도 고성 한적한 바닷가가 고향인 나는 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1961년 스물네 살에 결혼했다. 남편도 무뚝뚝한 경상도 충무(통영)사람이었는데 현직에서 한창 바쁠 때라 나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결혼 후 낯선 서울살이가 마음에 부칠 무렵 1970년대 군 보안 관련 일을 담당하던 남편 따라 금촌에서 4년을 보내게 되었다.

분단의 시대가 낳은 부산물, 정체모를 배신감

1975년경 금촌이라는 작은 소읍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서울에 나가려고 금촌국민학교에 다니던 딸 아이와 금촌역에 도착했다. 역 앞 느티나무 앞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귀동냥으로 들었더니 읍사무소 앞 도장집 황 사장이 20년간 고정간첩이었다고 다들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워낙 점잖은 양반이라 충격이 컸다. 그렇게 선한 얼굴로 간첩이었다니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일요일이라 시골 사는 나의 유일한 낙(樂)이었던 서울 나들이 길에 그 사건을 접하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열차는 문산 파주 월롱 금촌을 지나 일산 백마를 거쳐 능곡 행선 화전 수색 가좌까지 가는 완행열차였다. 추석 전 창밖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도도하게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이 하루 종일 걸리는 서울 나들이였지만 한 달에 두 번 주어지는 금쪽같은 낭만이었다.

1976년 큰 딸이 4학년 때 더 이상 금촌에 살고 싶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 뉴스를 보면서 몸서리가 쳐졌다. 바로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이었다. 판문점 접경 지역에 사는 불안감은 극에 달았다. 결국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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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남매와 양평 회암사에서 경수(8살) 경희(10살)

요꼬 공장 불빛아래 그녀들은 치열했다.

1970년대 후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요꼬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몇 달이었지만 내 인생 중 가장 공격적인 시간이었다. 큰 오빠는 일류대 출신이었지만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인이 원하는 직장에 다닐 수가 없었다. 시류에 편승한 출세를 포기하고 스웨터 가내 수공업인 요꼬 공장을 차렸다. 요꼬는 니트 편물 기계인데 1980년대 전성기를 맞았으며 어려서부터 자수 놓는 솜씨가 좋았던 나는 소일삼아 오빠의 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월급이란 걸 처음 받아보고 감격스러워 한 달 내내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생계수단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일하지 못하고 추억으로 기억되어 아쉬움은 오래갔다. 작은 공장 희미한 불빛아래서 여인네들이 바늘에 손가락을 수없이 찔려가며 잠을 쫓고 가정을 지켰다. 그리고 형제들을 키워나갔다. 불빛은 어두웠지만 그녀들의 희생만큼 세상은 밝아졌다.

경의선 완행열차 길의 간이역 ‘일산’

1970년대 경의선 열차 길의 간이역들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뤘다. 일산 또한 인구 100만이 넘는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고 판문점 근방지역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맞서야 했던 지역들이 신도시 계획 아래 아파트 숲을 이뤘다.

1970년대 말 금촌에서 서울로 다시 나오는 시점에 이웃의 배짱 두둑한 친구들은 수십 년 후 금촌이나 근방지역이 발전할 것을 미리 예견했던지 나에게도 땅 투자를 권했다. 나는 세상물정 모르던 여자라 은행에 묻어 두는 게 돈을 불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배짱 좋은 미숙 엄마는 금촌과 교하 땅에 돈을 묻고 금촌을 홀연히 떠났다. 무심한 세월은 수십 년 흘렀고 미숙 엄마가 수십억의 보상을 받고 일산 풍동 펜트하우스에 산다는 후문을 들었다. 부러운 마음이 한 톨도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사람은 자기 그릇 만큼 산다는 생각이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니 삶의 모습이 구분되는 건 당연하다.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만 우리 몫이다.

1990년대 나이 들어 찾았던 금촌과 일산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월 속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만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그 길가에 서서 오래 전 딸아이 손잡고 완행열차 타고 다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났다. 무심한 세월 속에서 그 여자는 허리가 굽었고 눈이 왕방울 만하던 열한 살 딸아이는 엄마가 되었다.

2017년 딸과 함께
2017년 딸과 함께

우리 부부 ‘헌체(獻體:유체기증)’를 실천하며 생을 마무리하다.

나는 내 또래의 여느 여인만큼 파란만장한 질곡의 인생사를 살아오진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마음 놓고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동력을 집안에서 만들었다. 물론 외로웠다. 격변의 시기를 살던 가족들은 자기방식의 삶이 필요했고 나도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76살에 치매를 만났다. 바깥 활동 없이 집에서 책만 읽던 내게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갑장의 친구들은 농사짓고 층층시하 시부모를 모시며 술주정하는 남편을 보필하던 때다. 그녀들이 나를 호강하는 여자라고 질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어느 만큼은 공평하다고 했나. 불편한 가운데 때때로 즐거운 북적거리는 삶을 사는 대신에 나는 평안한 고독을 선택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만의 성에 나를 가두면서 서서히 치매와 만났다. 말이 좋아 ‘예쁜 치매’라고 위로하지만 땅거미가 질 때면 무인도에 혼자 남아 있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것도 밧줄에 묶인 채로 말이다. 석양을 바라보면서 황홀하다고 감탄하던 내가, 사라지는 그 석양이듯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80년간의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나도 남편이 잠들어 있는 대전현충원으로 돌아가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생전에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고 불만이었지만 남편은 나를 험한 세상에서 모진 풍파와 싸우지 않게 해준 큰 울타리였다. 소나무 숲속 한가운데 햇살이 부서지는 그 한 평짜리 집에 우리 아이들이 간간이 찾아와주면 우리 부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우리가 살다간 흔적은 현충원 묘역이 기억해 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지역 의대에 헌체(獻體:유체기증)를 서약했다. 남편이 먼저 실천했고, 나도 내 생의 마무리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설니홍조(雪泥鴻爪 : 기러기가 눈밭에 남기는 선명한 발자국), 소동파 시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그 자취는 눈이 녹으면 없어지고 만다. 인생의 흔적도 이런 게 아닐까? 이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작은 발자취들을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며 한마디 거들어야 한다.

“당신 삶은 덧없지 않았소. 잘 살아 왔구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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