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동구 설문동에서 20년째 갈비전문점 '우리동네'를 운영하고 있는 백승현 씨(67). 일산을 고향이라고 여기며 60년 가까이 머물러온 고양 토박이다.

갈비집 입구에 있는 '우리동네' 간판이 정겹다.

30대에 안정적인 세무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개인사업에 이어 음식점을 열기까지 독특한 이력을 가진 백 씨는 고양시를 어머니의 품과 같은 도시라고 설명한다. IMF 금융위기가 닥친 이후인 1998년 고향이나 다름없는 일산에 갈비집을 연 것도 그런 이유다. 

단독주택을 개조한 음식점 입구에 들어서면 백승현씨 내외가 정성을 기울여 가꾼 정원이 먼저 눈에 띈다. 그가 운영하는 갈비집 '우리동네'는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라 그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잘 가꾼 '우리동네' 정원 모습

'우리동네'가 단순히 한 번 들렀다 가는 음식점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에 백씨는 앞마당에 커피숍을 오픈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평소 지역사회에 관심이 많다는 그에게 일산, 그리고 고양시에 대해 들어봤다. 

-일산에서 오래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가좌동에서 종가집이었어요. 40살이 넘어서 부모님이 저를 낳았는데 농사짓는 게 힘에 부쳤던 모양이에요. 제가 태어나고 서울로 학교를 보내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요. 전답을 다 팔아가지고 지금의 중산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때가 7살 즈음이었을 겁니다. 아파트가 넘치는 지금의 계획도시 일산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어요.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인터뷰 중인 백승현 우리동네 대표. 뒤에 클레식  레코드판(LP), CD 등이 많이 보인다.

-젊은 시절 세무공무원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24살 무렵에 공무원 시험을 봐서 들어갔어요. 사실은 독일 광부로 가려고 했어요. 이미 독일로 가 있었던 선배가 오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음악공부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광부 시험이 영어, 그리고 모래 가마니를 세 번을 어깨에 들어 올려야 했는데, 집에서는 두 번밖에 못 올리겠더니 시험장에 가니까 그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색약이라고 탈락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신문을 보니 공무원 시험이 나서 시험을 본 것이 국세청이었어요. 10년만 공직생활하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가 11년 하고 나왔어요. 공직생활은 참 재미있게 했어요. 가곡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국세청장이 매년 1월이면 전국 서장과 회의하는 자리에 불려 나가 '선구자' 등을 부르곤 했지요."

-그 후에 바로 음식점을 시작하셨나요.

"아니요. 11년 공직생활을 하고 89년에 나와 가지고 제일 먼저 내가 한 것이 건설업입니다. 회사 이름은 일산을 한글로 해서 '한뫼건설'로 지었어요. 건설의 '건'자도 모르는데, 그냥 부수고 짓고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배웠어요. 그래도 성실함이 있으니 계속 일은 생기더군요. 계약금을 받고 약속된 날에 건물을 지어주니까 유지는 잘 됐어요. 그리고 제조업도 했는데 제조업은 잘 안 됐어요. 거래처가 자주 부도가 나 힘들었죠. 그러다가 지금 이곳에 단독주택을 매입하면서 음식점을 시작했지요. 음식점은 부도 걱정 없고 현금 장사 업종이니 반은 해결된 걸로 생각하고 여기다가 '우리동네'를 하게 된거예요."

우리동네' 정원. 주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고양시에서 오래 살아오셨는데 대표님에게 고양시는 어떤 이미지인가요.

"고양시는 나에게 '어머니' 같은 도시에요. 제가 서울로 학교를 다녔지만 그 당시에 박석고개만 넘어 와도, 서오능만 넘어 와도 뭔가 공기가 다른 것 같았던 기억이 나요. 무언가 그냥 푸근하고, 여기를 떠나 보지 않아서 그런지 어머니 품 같은 그런 곳이지요. 고양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주 따뜻한 양지쪽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고양시에는 고봉산과  근처인 파주에 심학산이라고 하는 두 날개가 남아 있고, 서울과 인접해 있지만 같은 경계선상에 북한산이라고 하는 큰 줄기가 남아 있으니 어머니의 품 같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음악에 상당히 취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골에서 어떤 계기로 음악을 접하게 되었나요?

"저에게 음악을 접하게 한 선생님이 있어요. 지금 주엽동을 그 당시에는 '오마리'라 불렀는데,  오마리에서 농사짓는 농사꾼 오흥진 선배가 선생님이었죠. 그 선배는 그 귀한 전축을 가지고 논둑에 클레식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농사를 지었어요. 날씨 좋은 일요일이면 베토벤 심포니,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등 클레식 음악을 그 선배와 온 종일 들었죠. 그 분이 나에게는 음악 선생님이었어요. 오 선배님은 후배들을 위해 음악 감상할 기회도 열어주고, 대화 시간도 많이 가졌어요. 

그런 선배가 하루는 농약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개구리, 메뚜기가 없어진다며, 다음은 내 차례인 것 같아면서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어요. 우리 후배들은 김포공항에서 엄청나게 울었죠.

그 선배가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죠. 우리는 그 선배를 '작은 예수'라 불렀어요. 책도 많이 읽어 목사님도 그 선배의 지혜를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었죠.

-과거 고양시를 생각할 때 고양시 주변이 어떻게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우선 고봉산 철탑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어린 시절, 고봉산 정상에 올라가 호연지기를 기르던 시절이 그립네요. 정감어린 고봉산 정상에서 시민들이 고양시 사방을 바라보면서 함께 어울릴수 있는 시절이 오면 좋겠죠. 그러면 고봉산은 다시 우리의 산으로 돌아오겠지요. 또 한강을 우리 시민의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해외에 나가보면 한강만한 강이 별로 없어요. 서울시에서 한강을 시민들이 이용하듯이 우리에게도 한강이 우리 품으로 돌아 왔으면 합니다. 자연친화적으로 개발하여 고양시민 뿐만아니라 인근 수도권 사람들이 차도 한 잔하고, 자전거도 타면서 같이 어울리는 공간으로 말이죠. 

백 대표는 인터뷰 중에도 시종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고양을 문화의 도시라고도 하고, 통일한국의 중심 도시라고도 합니다. 고양을 사랑하는 시민으로 대표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고양, 일산이라고 하면 호수공원을 먼저 떠돌리고 호수공원 하면 꽃박람회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캐치프레이즈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라고도 하잖아요. 안타까운 점은 이런 것들이 정작 고양시민들의 삶 속에는 녹아들어 있지는 않아요. 이런 꽃박람회가 성공하려면 고양시민들이 꽃을 사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산이 좀 들더라도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주민들이 심고 가꾸고, 고양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전시장만 아니라 고양시 곳곳에서 꽃을 구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겠죠. 이를 위해 동별 혹은 단지별로 '꽃가꾸기 경진대회'를 하는 것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되겠지요. 

요즘 누구에게 물어보면 통일을 바라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통일에 대한 바른 인식들이 변화와 확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냥 통일기반도시라고 하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거창하게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데 리더들, 정치인들이 또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들이 근본을 좀 건드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시민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보시나요.

"고양시 전체를 상대하는 거시적인 정책이나 큰 밑그림 등 장기적인 비전이 없어요.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치인들이 현실의 소리를 목소리를 안듣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양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세요.

"어떤 도시보다도 살기 좋은 곳이어야 하겠지요. 생활인프라 뿐만 아니고 사람들이 정말로 나도 섞여 살고 싶은 도시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그래서 어머니 품같은 따뜻한 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 따뜻하고 품격이 넘치는 도시로 시민들이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이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게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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