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역사를 누군가에게 물어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손에 꼽히는 이가 이은만 문봉서원장이다. 고양시향토문화회 회장, 고양신문 발행인, 초대 고양문화원장 그의 이력은 그자체로 고양시의 역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고양 역사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은 고등학교 재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 수업 숙제로 지역 유물을 찾던 중 발견한 공양왕릉의 부서진 비석을 미군부대에서 시멘트를 얻어 고쳐 바로 세운 것이 계기가 됐다.

이은만 원장은 군대를 제대한 이후 20대에 농협조합장을 시작으로 고양에서 자신의 일을 찾기 시작한다. 고양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밤가시 초가마을을 지켜냈고, 고양문화원장으로 재직했던 시기에는 가와지볍씨 출토에 힘을 보탰다.

현재 정발산동에 보존하고 있는 초가집 원형 <사진 = 이은만 원장>

고양시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지역의 향토문화와 역사를 집대성하기도 했다. 송포호미걸이, 정발산 도당굿, 공양왕릉 고릉제 봉행, 송강문화제 등 우리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새 생명을 부여하는 일들도 그의 몫이었다.

그런 이 원장이 최근에는 이런 직함들을 모두 후배들에게 맡기고 작은 일부터 찾아 나섰다. 집 한 칸 없이 콘테이너에 사무실을 만들고 송강 정철의 시를 비석에 새기고 있다. 그는 이 또한 고양시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는 작업이라고 확신한다.

인터뷰 중인 이은만 원장

-선조가 고양시에 뿌리내리신지 400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선조가 450년 전에 황해도에서 현재의 고양시로 이주했어요. 이후에는 집안 대대로 고양에서 나고 자란 셈이지. 해주 출신 할아버지께서 한산 이씨였던 할머니께 장가들면서 정착했는데 여성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나눠주던 조선 시기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유추하는 거지. 처갓집 재산을 상속받고 이곳에 뿌리를 내린거라는."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주로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요.

"경기도와 국토부가 하는 공릉천 정비사업에 송강 시비공원을 조성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어요. 조성 당시 '여기에 뭘 할까요' 묻기에 송강이 여기서 낚시하던 터니까 공원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말한게 시작이에요.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2011년도 계획이 새워져서 송강의 시를 새겨서 뒤에는 기증자 이름을 써 넣어 시비공원을 만들고 있어요. 지금 한 열 댓 개 됐는데, 그것만 갖고도 좋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나는 한 30개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새로운 기증자가 나와야 말이지요."

-고양시의 역사 찾기와 바로세우기에 천착해오셨는데, 그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1958년이야. 고등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이 됐는데 역사 선생님께서 ‘고적을 답사해서 리포트 써오라’고 하는거야. 리포트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그러더라고. 58년도면 전쟁 끝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 때 내가 살던 곳이 공양왕릉이 있었어. 임금이 자살했다는 전설들이 쭉 내려왔던 곳이야. 거기에 가서 답사를 하는데 공양왕 고비에 묘(묘비)가 잘라져 있더라고. 전쟁통에 총알을 맞아가지고 반이 똑 잘라진거지. 그래서 그거를 찾아다가 삼송리에 미군부대가 있어요. 그게 공병대인데 거기서 시멘트를 얻어다가 붙였어. 그리고 리포트를 제출하니까 선생님이 학교 전체에 다니면서 이은만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해주는 바람에 내가 학교에서 스타가 돼 버렸어. 그게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고양시 역사에 관심을 가졌군요.

"그 다음에 이제 66년도에 농협장을 했어요. 원당리 이동 조합장. 스물여섯에 그러니까 군대를 65년도에 제대를 했거든 그러고 바로 한거지. 그때 공양왕릉 3900평을 국가에서 국유지 불하를 해주겠다는거야. 공매 처분될 위기에서 막아냈어요. 공매 처분 날짜 1주일 남겨 놓고. 그 후로 내가 이건 문화재라고 해서 그 의미를 설명해서 70년도에 서삼릉보다 먼저 이게 사적으로 지정이 됐어요. 내 평생의 자랑이야. 그러고 내가 여기 직원들 하고 해서 공양왕릉 능제를 지내기 시작했어. 내 돈으로 했어요."

공양왕 고릉제 모습.

-대표적인 직함으로 향토문화보존회 회장, 고양문화원 초대원장이 꼽히는데요. 

"고양문화원장을 88년도부터 하고 92년도에 그만두면서 문화원에 향토문화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어서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고양신문에다가 향토문화연구소를 만들었어요. 연구원을 두고 한성대학에 계신 정우식 교수를 자문 교수로 만들고 해서 개설했는데, 이후에 고양신문을 그만두고 나오면서 그걸 연구보존회로 만든거에요. 그래서 2010년까지 내가 그걸 했어요. 18년 동안. 거기서 한 게 많지. 거의 다 거기서 했지 뭐."

일산 신도시 건설 당시 '일산지구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한 구절. "특히 대화4리 성저마을에 있는 토탄층은 정밀발굴조사를 통하여 그 성격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라는 문구를 근거로 이은만 원장은 관계기관에 끈질기게 요구하여 심층발굴을 통해 5000년 전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인 가와지볍씨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진 = 이은만 원장>
가와지볍씨 발굴 현장 <사진 = 이은만 원장>

-그간 관심을 두신 고양시의 역사라던가 사건들이 있을까요.

"행주대첩의 역사적인 승리도 기려야 하겠지만 벽제관 전투에서의 조명연합군의 대패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후세에 널리 알리는 작업도 충실해야지요. 임진왜란 400주년 기념 행주대첩 학술심포지엄을 국사편찬위원회 하고 내가 했어요. 지금도 우리나라 제일 큰 백과사전에 행주대첩 관련 그 논문이 들어가 있다고. 그런데 백제관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지금 벽제관 전투라는게 이여송이가 패해서 도망갔다. 또 거기에 있는 정자 하나를 일본이 가져갔다 이 정도만 알고 있다고. 아니 육각정 그까짓 거 다 그 환수해달라는게 뭐가 중요해요. 그거 나무조각이라고 나무조각. 똑같이 지어라 이거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해서 문화재를 피탈당했고 다시 세웠다라고 쓰면 되잖아요. 역사라는 것은 기록인데 그까짓 거 찾느라고 수억 들여서 왔다갔다 하는게 난 아주 그 웃겨요. 학술이 뒷받침 안 되는 건 제로야." 

-오랜기간 고양 역사찾기를 해오셨잖아요. 아쉬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으신지요.

"동조자가 부족한 거지 동조자. 돈 안되니까 그렇지 뭐. 조선왕릉도 벌써 우리가 조선왕릉이 8개가 있잖아요. 공양왕릉까지 왕릉만 해도 지금 9개 아니에요. 고양의 역사라는 게 고려, 조선 이 연결점이 다 고양에 있어요. 더 큰 데가 어딨어. 그리고 이 고봉산 있죠. 고봉산을 점령한 국가가 통일을 했어요. 고봉산이 그렇게 중요한 전쟁터였다고. 그러니까 이 사실 삼국의 제일 중심이 고봉산 아냐 고양이지 뭐. 그 역사의 중심추고 특히나 가와지볍씨 같은 거 출토된 거 봐서는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지방자치에 대한 애착심을 갖기 위해서는 지역을 알려야 하고 배워야 해요. 그 다음에 사람들이 뭘 배울지는 스스로 선택하는 거고, 우리가 사는 지역이 어떤 곳이다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줄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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