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목사
조규남 목사

[고양일보] 최근에 집에서 빈둥거리며 두 편의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2018년 상영된 <나의 아저씨>와 바로 얼마 전 상영되어 정치인들의 입방아에도 오른 <DP>입니다. 전자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루 하루를 피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의 일터와 가정 그리고 이웃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이며, 후자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군대 내의 이야기로, 헌병대 군무 이탈 체포조(Deserter Pursuit)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두 작품의 공통점은 첫 째로 어두운 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재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과묵하니 말 수가 적고 인내형이면서 착한 성품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들을 복잡하게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벽들이 이들의 삶을 우울하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이리저리 얻어터지면서도 앞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절대적인 선호도는 '재미'입니다. 무엇이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는 돈도 필요하고 외모도 출중해야 하지만 연애 때와는 달리 계속 같이 붙어 살아야 하는 결혼생활에서는 자신을 재미있게 해주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T.V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인 요즘 화면을 메우고 있는 얼굴들은 재미를 만들어내는 개그맨 출신들이 다수입니다. 골치 아픈 현대 생활에 괜히 심각한 멜로 드라마보다는 몇 번의 웃음으로 머릿속을 텅텅 비울 수 있는 재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재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재미있을 뿐입니다.

위 두 개의 드라마는 어두운 현실을 조명하며 우리로 하여금 뭔지 고민하게 하는데 애써 웃기는 내용이 없음에도 재미가 느껴지는 것은 의미의 추구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재미는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웃음으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 추구가 따르는 드라마에서는 자신들을 욱조이고 있는 현실의 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몰입하게 하면서 주인공의 고뇌를 함께 나누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피하고 싶도록 아프면서도 묘하게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는 묘미의 재미가 있습니다. 피가 날 때까지 손톱살을 뜯으며 은근히 그 작은 고통들을 즐기는(?) 오래된 나의 버릇과도 같습니다.

재미와 의미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의미의 추구가 따르지 않는 재미는 그 순간으로 끝나고 아무 여운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을지라도 의미가 확실하게 주어지면 여운이 남아 작은 모티브를 통해 삶의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재미 없는 의미는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좁은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문을 통과해야 더 나은 신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고 싶고 그냥 싫은 것입니다. 재미 없는 천국에 가기보다 재미 있는 지옥생활을 꿈꾸는 것과도 같습니다.

재미와 의미가 공존할 수는 없을까요? 아니, 있습니다! 희극인 챨리 채프린(Charlie Chaplin)은 재미와 의미를 함께 풀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팔불출과 같은 외모와 동작으로 사람들을 웃기며 재미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코미디는 결코 경박하지 않았으며 의미가 풍부한 유머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재미와 의미를 함께 느끼도록 해주었습니다. 웃음거리가 되는 재미를 통해 그 재미 안에 숨겨진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왜 위의 어두운 내용의 드라마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게 됐을까요? 의미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게 주어진 현실은 어둡지만 곧 이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세계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추구하는 의미가 확실한 진리로 내 가슴에 심어져야 하며, 이에 대해 좁은길을 걷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재미로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인내하며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드라마의 두 주인공은 모두 착합니다. 착하기에 사회에서 부적응자가 되기도 하고 그 삶이 힘듭니다. 그러나 시청자는 그들을 응원하고 해피엔드의 결말을 보기 원하여 끝까지 주인공과 같이 갑니다. 바보처럼 착하다는 것이 승자의 자리는 아니더라도 결코 루저의 자리에서 자멸해가는 것이 아님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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