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희 어머니,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이 노을 속에 묻혀 더 붉은 빛으로①
이순희 어머니,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이 노을 속에 묻혀 더 붉은 빛으로①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2.05.31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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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재능이 유난히 많아서 각종 콩쿨에서 수상을 많이 했다
노래에 재능이 유난히 많아서 각종 콩쿨에서 수상을 많이 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낙화유수 네 글자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어여쁘던 꽃이 물위로 진다.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은 어디로 갔나

이순희 어머님이 소녀시절부터 잘 부르시던 남인수 선생님의 ‘이 강산 낙화유수’ 노랫말이다. 어머니께서 세월의 질곡과 무게를 알기 전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노래였다. 당신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열 살 무렵 무심코 흥얼대던 노랫말처럼 인생이 흘렀다. 질곡의 삶을 견뎌내고 이제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다운 황혼을 만끽하고 계신다.

점심 선약이 있으셔서 짧은 시간 들려준 어머니의 이야기는 노을처럼 지고 있지만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목소리를 가둬놓아서 예전 노래 소리가 그립다

기억은 왜 그리 아플까, 추억은 그립고 따뜻한데...

영동이 고향인 나는 영동 중앙동 읍내에서 성장하면서 영동여고까지 다녔다. 꿈이 너무 컸던 시골 아가씨라 스물두 살에 시집을 가는 것은 나에게 처음으로 닥친 위기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이기도 하지만 왠지 고단한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우리 동년배들의 결혼이라는 것이 자기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랑 얼굴 구경도 못하고 첫날밤을 맞이한 이들도 있으니 나는 싫다고 마음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던것 만으로도 위안 삼아본다.

꿈 많았던 순희가 결혼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지면서 인생의 굴곡을 맞게 된다.

내 유년의 뜰에는 예쁜 꽃만 심었다. 노래 잘해서 콩쿨에 나가 상도 타고 뜀박질도 성큼성큼...남한테 지는 거 싫어해서 공부도 곧잘 했고 못 하는 게 없었다. 땅거미가 지면 학교 강당으로 달려가 혼자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사춘기 소녀의 꿈을 키웠다. 밤이면 부모님 몰래 촛불 켜놓고 공부하던, 꿈으로 꽉 찬 10대의 꽃다운 시절이 있었다. 무심한 세월은 소리도 없이 70년을 달려와 어느 결에 8학년 6반 이정희라는 명찰을 달았다.

관광업을 왕성하게 하던 남편과의 젊은 시절
관광업을 왕성하게 하던 남편과의 젊은 시절

결혼으로 좌절된 스물두 살 시골 아가씨의 꿈

친정은 먹고 살만한 집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도 짓고 어머니가 요식업을 하셨다.

내가 ‘잔치방’을 하면서 한 시절을 풍미할 수 있던 것도 어머니의 손맛을 대물림받은 것이다. 우리 친구 아들이 결혼식한다고 청주에서 잔치방을 불렀는데 음식을 먹어보니

‘이 정도쯤이야’ 라는 자신감이 생겨서 나도 잔치방을 열게 되었다. 지역의 유명 인사들 잔치에도 음식을 내고 잔치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내 손맛과 솜씨로 잔치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보람도 컸고 뿌듯했다.

꽃다운 나이, 22살에 결혼했다.

결혼 전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구세군 영동 종합병원에 원서를 내고 원무과에 합격한 상태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니 유교문화에 젖어있던 부모님들은 ‘바람난다는’ 말로 나의 직장생활을 반대하셨다. 부모님은 여자는 집에서 조신하게 신부 수업하다 결혼하는 것이 여자의 길이라고 결정하셨다. 꿈이 좌절되는 고통과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해야 하는 고통이 맞물려 갓 스무 살이 넘은 내가 만난 운명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우리 이웃의 피복사하는 언니의 시동생이 군인 가서 우리 영감님과 군대 동료라 중신을 섰다. 휴가 때 같이 나와서 우리 집에서 묵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사윗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인물이 훤칠하고 이북에서 내려와 혈혈단신이었지만 외동딸이던 내가 층층시하 시집살이 안 해도 된다며 어머니가 더 애가 닳았다. 나는 힐끗 얼굴을 보니 인물은 준수했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영동에서 나고 자라 대전도 나가보지 않았던 내가 서울 가는 열차에 올라 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시골버스로 강원도 화천이라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부대 앞 마을에 단칸방을 얻어서 살림을 차리고 사과 궤짝 위에 그릇을 오종종 올려놓고 소꿉장난 하듯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아궁이 불을 떼면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 내 타는 속과 눈물이 같이 묻혀 버렸다. 혼자만의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연기처럼 사라져 아무도 내 마음을 몰랐다.

약혼 사진 하나 찍고 고향에서 천리 길을 떠나왔다. 화천은 유난히 추운 곳이라 겨울에는 3시만 되면 해가 떨어지고 영동에서 눈 구경 제대로 못하던 시절에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부모님 성하에 마지못해 결혼한 것을 남편도 알고 있는지라 남편도 나에게 데면데면 했다. 내내 겉도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외롭고 쓸쓸한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뱃속에 아이가 태동을 시작하면서 마음의 소용돌이는 더 커졌지만 나는 아내가 아닌 엄마로서 견뎌내야 할 몫이 또 다시 주어졌다. 입덧이 심해 고향으로 잠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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