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대표이사 / 목사

인생을 험한 바다에 빗대어 고해(苦海)라고 말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날보다 궂은 날이 더 많았다는 것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같아서는 여러 가지로 더 죽을 맛이어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가 많다.

이럴 땐 바다에 나가지 말라. 만일 그대가 바다를 찾아가 그대의 슬픈 마음을 위로받고자 한다면 그대는 분명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자에게 바다는 환희의 바다로 우리 앞에 펼쳐지지만, 슬픈 마음으로 찾아간 자의 바다는 애수의 여인으로 우리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바다는 결코 거짓이 없어서 우리의 마음 그대로를 반사해 준다.

예전 30대의 젊은 시절, 나는 바다에서는 큰 배의 항로를 운항하는 항해사였지만, 인생여정에서는 항로를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은 존재였다. 정신적 방황과 육체적 방랑이 어우러져 방탕의 삶을 만들어 냈다. 침몰 직전의 부서진 난파선이었으며, 방향감각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표류선이었다. 그리고 뿌연 안개 속에서 실체도 없이 흐느적거리는, 유령선과도 같은 영혼의 곤고함이 내 삶의 전부였다.

태평양 바다 한 복판에 서면 바다는 온통 끝없는 수평선으로 사면을 둘러싼다. 목표가 분명히 보이는 바다의 수평선은 확 트인 시야를 제공하지만, 표류선과 같이 갈 길을 잃은 바다의 수평선은 병풍처럼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수평선으로 사면이 에워싸인 바다에서 그 어떤 표지를 발견하지 못할 때 항해사는 천측을 시작합니다.

sextant(육분의; 六分儀)를 사용하여 수평선으로부터 하늘에 떠있는 천체까지의 고도를 측정한다. 태양과 달, 그리고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들의 고도를 재기 시작한다.

천측(天測)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물이 떠돌이별(惑星)이 아닌 제자리별(恒星)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별이라고 모두 내가 방향의 기준을 삼아야 할 별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한 자리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별이라야 한다.

고도를 알면 방향이 보인다. 수평선에서부터 천체까지 측정된 고도는 그 천체와 선박간의 방향을 산출해 낸다. 그리고 천체로부터의 고도를 통해 방향이 산출되면 현재 선박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항해사는 그 망망한 바다에서 씨줄과 날줄로 표시되는 선위(船位)로부터 목적 항까지의 항로를 결정한다.

죄(罪)의 한자풀이는 사방(四)을 둘러보아도 아닌 것은 아니다(非)이다. 죄로 둘러싸여 있는 세상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옳음(義)'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들은 넓게 열려 있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올바르게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진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처 입을 대로 상처입어 찢기고 망가진 난파선과 같은 영혼들이 너무 많다. 또한 목적 항을 잃어버린 채 어디로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르는 표류선과 같은 행렬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자신에 의해 고통 받았던 영혼들이 울부짖는 유령선의 환영에 시달리기도 한다.

바다에서 사방이 막막하여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할 때에는 얼른 위를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항상 제자리를 지키며 결코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반짝이는 하늘의 표적들이 있다. 그 표적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표적과 나 사이의 고도를 측정하여 현재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후, 곧바로 지금의 내 위치에서 다시 방향을 잡아 항로를 찾아야 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다 꽉 막혀 있어 아무런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가? 이제 살펴 볼 곳은 딱 두 곳밖에 없다.

서 있는 자리의 밑바닥이든가, 아니면 머리 위의 하늘이든가... 이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천측을 시작하라.

그리하여 내가 있는 자리로부터 하늘 그 높은 곳에 있는 '존재'까지의 고도(높이)를 측정한 다음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내가 나아가야 할 목적지의 방향을 결정하라. 고도를 알면 방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