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사회 초년병이었던 시절,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한참 들떠 있을 때, 서울 명동의 한복판에 있는 다방 '설파'는 우리 친구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어느 날 친구 한 녀석이 맞선을 보고 와서 침이 마르게 여자 자랑을 해댔다.

"딱 내 스타일이야. H대 미술학과 졸업반인데 그녀를 만난 게 정말 행운이야. 대박이라고"

"그래, 뭐가 어케 좋았는데?"

"우선 내가 좋아하는 긴 쌩머리에, 청바지 작업복에 그리고 하얀 실내화 운동화를 신고 나왔는데..."

"그래서?"

"그 운동화 뒤꿈치를 찌그려 신은 채 맨 발로 나왔더라고"

"아니, 여자가 맞선 보는 자리에 그러고 나와? 넌 정장차림이었고?"

"나야 그랬지. 그런데 그녀는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나봐. 작업하다 손만 씻고 나왔대"

"근데 그런 여자가 좋아? 그런 차림으로 제 멋대로 맞선보러 나온 여자를?..."

 

녀석은 이제야 자신의 미적 식견을 밝힐 때가 왔다는 듯,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난 그 모습 때문에 반했다는 거 아니냐. 있는 모습 그대로. 전혀 꾸밈없는 평소 모습 그대로가 좋았다는 거지"

"그래서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 들었다는 거냐?"

"그럼. 내가 지금까지 그런 여잘 얼마나 찾았는데..."

 

녀석을 첫눈에 홀딱 반하게 한 그 개성 넘치는 '그녀'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은 녀석에게 한 마디로 잘라 말해줬다.

"안 돼!"

"아니, 왜? 너무 멋지잖아! 웬만한 사고의 틀을 깨는 여자라고. 개성이 톡톡 튄다니까"

"너, 임마. 그 여자와 연애 정돈 괜찮아. 그러나 결혼은 안 돼!"

"아니 왜 안 된다는 거야? 넌 고수니까 좀 알아듣게 자세히 말해줘야 알 거 아냐"

"그런 여자와 살면 피곤해져. 연앤 몰라도 결혼생활은 피곤하면 안 되잖아"

"피곤케 하는 여자라고?"

"자식! 그렇다니까. 그런 여잔 피곤한 여자라고."

 

나는 녀석이 인정해 준 고수답게 차근차근 그 이유를 설명해 줬다.

"네 말대로 그 여잔 개성이 강한 여자야. 그런데 임마! 지 혼자 살 때는 개성이 강한 게 뭐 좀 될련지 모르지만, 함께 살려면 때로 그 개성을 죽여야 하는 거야. 특별히 여잔 남자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형이어야지. 지 멋대로 하면서 개성 탓이라고 하면 그때부터 너는 그 여자의 개성에 따라 비위맞추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네 존잰 없는 거지. 다만 너는 그 여자를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 인생을 살아가야 할 팔자가 되는 거야. 야, 생각해봐라. 처음 만나는 맞선 자리에서 그런 차림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 난 그쪽이 보시는 대로 이대로의 여자니까 좋던 싫던 그쪽이 알아서 맘 내키는 대로 하세요. 그래도 내가 좋다면 나도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테니까. 이런 식이라는 거지. 알겠어? 그래도 좋아?... 그런 여잔

 

그냥 혼자 살게 놔두고, 너를 만나러 오기 위해 한껏 멋을 부리고 나온 여잘 만나도록 해. 너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여자말야. 네가 어떻게 보던 말던 난 내 식대로 산다는 여자 말고. 알았지? 애인은 그 맛일련지 모르지만, 집에 있는 마누란 날 편하게 해주는 여자여야 해. 피차간 그렇지만"

"........................................."

 

시무룩한 표정으로 묵묵히 일장연설을 들은 내 친구 녀석은 결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또 그리고 그는 채 3년을 넘기지 못 하고 헤어졌다. 그나마 그 3년 동안도 함께 생활한 것은 고작 1년도 안 된다.

내가 그 방면의 고수라고? 히히히... 고수가 그렇게 허벌레 깨지겠나?...ㅉㅉㅉ. 과대포장이었지. 난 사실 여자가 무서운 사람이다. 특히 개성 강하고 세칭 똑똑한 여자 말이다.

 

요즘 TV만 틀면 여걸천하가 이루어진 착각에 사로잡힌다. 한 인간, 한 여성으로 볼 땐 정말 알아줄만한 여자로 여겨지지만 나와 함께 한 솥 밥을 먹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할 땐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 작은 생활공간에서 나는 없고 그녀만 움직이는 그림만 그려질 뿐이니까.

혹시 불끈하는 여성들이 없기 바란다. 난 결코 남성제일주의자가 아니니까. 지금 내 얘기는 남성이고 여성이고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일개인으로서 날 피곤케 하는 여잔 싫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남성만 설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 그림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드러운 여자가 좋다. 편한 여자가 좋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 폴리네시아 쪽에 갔을 때 만났던 하얀 바다와 아름다운 여인이 생각난다. 그때 외항선 마도로스로 낭만적이어서 그랬을까? 그곳 남자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여자들이 편해 보였다.

 

왜 아주 수준 높은 심미안을 가진 유명한 예술가들이 폴리네시아 여인들을 좋아했을까? 자신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여자들. 자신이 좀 무능해도 윽박지르지 않는 여자들. 그냥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는 여자들. 이래서 남자들은 여자에게 은근한 백치미(白痴美)를 기대한다. - 이런 여자들과 사는 남자들은 참으로 늘어진 팔자로다.

 

요즘 날씨가 추워져 옴짝달싹 하기 싫은데, 여자들에게마저 주눅 들어 사는 사람들 보면 집 안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한다. 더구나 나이 들어 힘 빠지면 이건 말이 아니다. 어쨌든 가능하면 스트레스 받을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내게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피할 일이다. 그냥 편하고 기분 좋게 대해주는 사람만 만나자. 그나저나 요즘 젊은 것들이 내 말 듣겠나?

 

한참 젊었을 사회 초년병 시절에도 듣지 않던 이야기를.... 피똥 싸고 코피 터져봐야 그 맛을 알 거다. 1년을 살다 죽어도 개성 있게 살다 죽겠다면 그것도 좋다. 아무도 말릴 사람 없으니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지난 날의 추억도 떠오른다. 풋~ 그 때 그 시절 좋았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어도 지금은 그 시절의 낭만을 느끼기가 어려운 듯하다.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해서일까? 그 기다림과 설렘 그리고 따뜻한 마음들.... 겨울 태양볕이 잘 드는 남향의 창을 마주하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머리에 앉은 아침 시간에 아내가 갖다 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홀짝거리며 London symphony orchestra의 크리스마스 캐럴 연주곡을 듣는 이 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 크리스마스!

눈내린 고봉산 언저리
눈 내린 후의 세상

 

 

아~ 크리스마스! 구세주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Merry Christmas, Happ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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