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 오는 풍경이 좋다. 속삭이듯이 소곤소곤 내리는 빗소리도 좋다. 새소리나 벌레소리처럼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도 좋다. 드럼 치듯 창문이나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도 좋다. 주룩주룩 여름날에 내리는 장대비도 좋다. 무자비하게 키 큰 나무들을 두들겨 패면서 쏟아지는 폭우도 좋다.

비 오는 날 나는 한 곳에 가만있지 못한다. 책을 보고 있든지 일을 하고 있든지 자연스럽게 빗소리를 따라 밖의 풍경을 떠올린다. 머릿속은 내가 있는 곳 주위의 풍경이 어른거린다. 육교에 비 내리는 풍경. 까만색으로 변한 아스팔트에 쏟아지는 빗물의 번들거림. 먼지를 말끔하게 씻어낸 나뭇잎들. 싱싱한 초록. 짙은 색깔로 변한 나무줄기들. 알록달록한 지붕들. 기와지붕들. 기다렸다는 듯 묵직한 톤으로 변한 벽돌담과 블록 담벼락들. 먼 산자락 나뭇잎에 듣는 빗방울들.

이때 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접고 밖으로 나간다.

빗방울들. 유년의 친구들처럼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매번 다른 모양으로 비는 내린다. 아늑하고 친근하다. 그런데 바람에 쏠리고 처음 보는 것처럼 다른 모양이다. 흠뻑 젖은 담벼락도 있고 한쪽만 젖은 담벼락도 있다.

네루다는『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에서 말했다. 아니다, 다른 책에서 말했는지 모른다. 그쪽(남미)에선 비가 오면 일주일 씩, 열흘씩 밤낮없이 쏟아진다고. 그땐 무서움이 왈칵 일었다. 무슨 주술적 느낌 때문이다. 이젠 일주일 씩, 열흘 씩 내리는 그쪽의 비를 경험하고 싶다. 옛날엔 우리도 그랬다. 밤새 쏟아진 비에 집이 떠내려가고 돼지도 소도 떠내려갔다. 한밤중에 삼악성에 가까운 비명이 들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강둑이 뭉뚝 잘려나간 것을 보았다.

바슐라르는 4원소론을 주장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물질을 찾아야만하며, 어떤 물질 원소가 자신의 실체, 규칙, 또는 특별한 시학을 몽상에 제공하여야만 한다”고 『물과 꿈』에서 말했다.

4원소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이래로 서구에서 널리 확산되어 온 인식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모든 원소는 따뜻함과 차가움, 건조함과 축축함의 네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착상은 중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4원소론은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인간 정신의 “오류”이며 ‘인식론의 장애’이지만, 상상계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꿈, 즉 인간의 몽상의 틀을 보여준다. (뤽 베송의「제 5원소」라는 영화도 이런 맥락에서 보라보면 좀 더 리얼리티가 있다)

바슐라르는 문학 이미지를 연구하면서, 문학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들도 이 4원소들 중의 하나의 원소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인은 자신이 애호하는 원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방영되어 나온다고 했다. 예를 들어 호프만의 작품에는 불에 대한 이미지가 주로 나오며, 에드가 포우나 스윈번 같은 작가들은 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다. 또 대기의 이미지가 강한 작가로는 니체를 들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은 나무에 스며들어서는 수액이 되었다가 짐승에 스며들어선 체액이 되었다가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것을 묽게 변화시켜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바다로 모여 들어선 모든 것을 정화시킨다. 하늘에서 떨어질 때 빗물은 생명을 머금는다.

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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