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거의 20여 년 전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사역자로 부임하게 되어 후배 입장에서 선배 목사에게 인사차 들렸다는 것이다.

사실 놀랐다. 지금까지 이런 신고식(?)은 처음 받았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작은 규모의 교회, 무명 목사에게 찾아와 인사를 하는 전례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나 역시 이런 일로 찾아간 적도 없었으며, 아예 개념조차 없는 일이었다.

B목사는 여자처럼 희고 고운 피부에 약하게 보이는 몸매에다가 나이와는 맞지 않는 흰 머리로 고매한 학자를 연상케 하였다.

한참 어린 후배 목사였지만 첫 인상에서부터 풍기는 기품은 오히려 나의 나이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그가 혹 내가 모르는 정치적인 어떤 일면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여 한편으로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역시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알아갈수록 새로운 면모와 내가 오히려 배울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언변이나 글에서 학자풍인 것도 그러했지만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보고 그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금방 알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모임이나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한결같은 태도였다. 당당하였고 철저히 겸손했다. 약하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노회 같은 회의석상에서 손을 들고 발언하기 시작하면 주위는 조용해지고, 그의 말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올바른 말, 이치에 맞는 말,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여 양 편을 모두 아우르는 그의 논지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면이 좋았다. 은근히 반골 기질이 있는 나의 욕구를 채워주면서도 그는 한 편에 기우는 법이 없었다.

B목사가 처음 시작한 일은 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농아인들의 친구'라는 모임이다. 농아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듣지 못하는 자의 귀가 되어주기 위해 여러 모로 힘쓰곤 했다.

그는 지역에서나 교회 차원에서 여러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 무리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리 안에서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스스로 주장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그가 그 중심자리에 있더라는 말이다. 사람은 한 알의 밀로 썩어지는 만큼 그 열매를 더하기 때문이다.

내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가장 어려운 재정적 시점에 놓여 있을 때 둘째 아들이 갑자기 진로를 바꿔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목사 된 것,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여 목사 가 된 큰 아들. 막상 작은 아들까지 목회자의 삶을 살겠다고 나서자 나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가난한 목사인데, 직장마저 내려놓고 공부의  길에 들어섰으니 그 뒷바라지를 누가 할 것인가 하는 인간적 걱정이었다.

어느 날, B목사와 조용히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갑자기 내 작은 아들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 때 00대 졸업하고 나서 지금 뭐하고 있어요?"

"아~ 그게.... 잠시 일반 직장생활 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지금은 신대원 준비 중입니다."

"그래요? 그럼, 잘 됐네. 내년에 우리 교회 교육전도사 한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 교회 보내주세요."

"아니, 아직 신대원 시험도 안 봤고, 또 합격여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번 시험 합격여부에 관계없이 아드님은 앞으로 이 사역자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에 이미 결정한 것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일단 신대원에 합격하고 난 후에야.... 그런데 지금 어떻게 그걸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인 나의 결정이 아니라, 본인에게 그 의사를 물어봐야겠지요."

"교육전도사 사역 나가는 것이 언제 신학교육 다 받고나서 나가나요? 신대원 들어가면서 바로 나가지요. 그리고 또 계속 배워나가고요. 또 아드님은 이미 아버지 목사님 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자랐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되나요? 그리고 본인의 의사결정은 제가 직접 본인에게 의향을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이 되어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결국 이 일은 B목사와 아들 사이에서 해결 짓도록 물러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웬만해선 한 번에 합격하기 힘들다는 P신학대학원에 늦게 방향 전환하여 입시 공부기간이 짧은 편이었는데도 아들은 떡 합격을 한 것이다.

아들의 신대원 입학에 관한 모든 재정 부담은 B목사의 H교회에서 장학금 형식으로 모든 것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사역자로, B목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며 목회자의 자질과 성품을 익혀나갈 수 있었다. 특히 이곳에서 아들은 B목사로부터 '인간됨'을 배웠다. 그리고 이 H교회를 섬기는 동안, 신학도인 여학생을 만나 B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또 그런 중에도 부부가 함께 피지(Fiji)에서 1년 여 동안 선교사 훈련을 받고 오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교회를 섬기는 동안 쌍둥이 자녀를 갖는 축복과 함께 부부가 나란히 한 날 한 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B목사는 시끌벅적하며 강렬한 태양빛을 발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조용히 달빛처럼 은은하게 주위를 품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듯하면서도 잠시 주위를 돌아보면 항상 고통 받는 약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은밀히 도움의 손길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와 나의 관계 역시 이러한 달빛의 사랑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런데, 이토록 주위에 달빛처럼 은밀하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그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특별성 폐섬유화>의 질병을 갖게 되었다.

숨이 가빠지면 곧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폐이식을 유일한 치유책으로 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는 소천하신 아버지를 목사로 해서, 3형제 모두가 목사인 가정에서 둘째이다.

그가 최근 SNS를통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지인들에게 알려왔다. 몇 년 전에 자신과 같은 병 증세로 소천한 형이 있는데, '형에게'라는 제목의 서간문이다.

그는 최근의 편지글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야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나임을 알기에 더 소중하게 삶을 생각하며 살고 싶다"라고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유한한 인생 가운데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말마따나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죽음을 딛고 우리는 새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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