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남 사회복지법인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지난 월요일 전화전문상담사 및 자살예방상담사 교육이 3개월의 교육과정을 거쳐 수료식을 갖게 되었다.

교육을 맡은 기관의 책임자로서 잠시 인사말을 할 기회를 가졌다.

제가 생명과 관계되는 전화위기상담, 자살예방, 호스피스 등의 사역에 꽤 오랫동안 앞장 서 일하게 되는 것에 그 연유를 묻는 사람이 있다. 물론 대답은 간단하다. 생명을 살리는 일처럼 중요한 명제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최고의 절대 가치가 부여되는 일이니까.

굳이 개인적인 이유를 묻는다면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한 한 사건이 제 젊은 시절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사가 되기 전 외항선 3등 항해사 시절인 1978년경 미국 입항을 얼마 앞두고 기관원 한 사람이 몸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 당시 여객선과 달리 3~40명이 승선하는 상선(화물선)이라서 배 안에 특별히 의사가 탑승한 것도 아니어서, 배 안의 의료관계 담당을 3등 항해사인 내가 맡고 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기관원을 살펴 본 결과 그는 너무 말짱했다. 그가 스스로 입을 벌려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말짱한 사람이었다. 임시처방의 이런 약 저런 약 주어봤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배 안에서는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이 어서 빨리 배가 목적지 항구에 도착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큰소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몸 전체가 아프다고 뒹굴더니 나중엔 참을 수 없는 머리의 두통을 호소했다.

나는 그의 고통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너무 말짱했으니까. 결국 그의 상태에 대해 선장에게 '꾀병' 같다는 내 나름대로의 진단 보고를 했다. 그가 밤새도록 고통을 호소하며 벽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대도 '꾀병'이라는 생각으로 누구 하나 그의 곁에 다가가지 않고 밤에 시끄러워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짜증난다고 말할 뿐이었다.

망망대해 넓은 태평양 바다에서, 그 위를 항해하는 배의 구석방에서 그는 홀로 고통을 못 이겨 방바닥을 구르며 울부짖었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서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외로운 자신만의 고독의 투쟁이 끝나 미국 어느 항구에 입항하여 병원에 실려 간 이후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미국 병원에 도착한 얼마 후 뇌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죽어서야 고국에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살인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로 마음에 작정한 것이다.

사실 그 시절엔 암이 어떤 병인지를 잘 알지도 못했다.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그가 죽음을 코앞에 두고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혼자 외롭게 몸부림칠 때 그의 옆자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함께 그의 고통을 나눌 수만 있었다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었을 텐데, 그의 고통을 외면한 채 그로 하여금 홀로 외롭게 죽어가게 한 것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다. 

회개와 함께 남몰래 흐르는 눈물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생명을 살리는 영혼 사랑의 동기유발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성경에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생명이라는 이 절대 가치의 명제 앞에서 어느 누가 다른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 이 시대처럼 생명 경시 현상이 두드러진 때가 없는 것 같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바로 우리 한반도 역시 항상 전쟁 촉발의 위기감 속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헨리 나우웬은 "세속적인 삶이란 주변의 반응에 좌우되는 삶"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주변의 반응에 너무 민감하다. 조금도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용서와 화해도 없다. 아파트 외벽 도색작업 중인 근로자의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지탱하던 밧줄을 칼로 끊어 추락사 시킨 사건도 있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왜 이토록 분노가 많고, 분노 조절이 안 되어 그 귀중한 생명들을 잃게 하는지 두려운 일이다. 이러한 시대풍조는 그 내면이 공허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좌우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적인 것들은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것들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체성이나 절대 가치에 대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주변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서는 확고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 생명, 영생, 진리, 자유, 기쁨, 동행, 나눔... 등의 단어들이 내 삶의 축을 이루며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태에서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거친 폭풍우 속 등대의 모습은 의연하다. <사진 = 게이이미지뱅크>

금방이라도 천둥 폭우를 몰고 올 듯한 진한 먹구름이 하늘에 드리우고, 바다는 이제 서서히 풍랑이 거세어지고 있지만 등대의 불빛은 변함없이 항해하는 배들의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다.

풍랑의 바다만을 바라보지 말라. 변화무쌍한 먹구름의 향방에 따라 마음마저 어둡게 하지 말라. 오직 그 가운데서도 우뚝 서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다 하는 등대를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등대가 험한 파도 속에서도 불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웃들의 생명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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