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고양의 '고양시 마을 이야기'를 시작하며…

미디어고양은 고양시 각 동의 지명 유래 및 마을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고양시를 보다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미디어고양에서 취재한 내용과 고양시청, 주민센터 및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보관 중인 자료를 바탕으로 고양시 마을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특히 이번 기사를 위해 자료 인용을 허락해주신 정동일 고양시 역사전문위원님(고양의 지명이야기 저자)과 이상국 스토리텔러님(스토리텔링북 고양 이야기여행 저자)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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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는 2017년 5월 현재 행정동 39개 동과 법정동 5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마을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고양시 마을 현황 (2017년 5월 기준)

Ⅰ. 고양동(高陽洞)
고양동은 고양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행정동으로 법정동은 고양동, 벽제동, 선유동, 대자동 일부지역 등 4개의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고양동 위치 <자료 = 고양시청>

1. 고양동 현황
▲행정동 : 고양동
▲법정동 : 벽제동, 선유동, 고양동, 대자동 / 35통 179반
▲인구 : 33,034명(2017년 3월 1일 기준)
▲면적 : 25.04㎢
▲주민센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5(고양동 195-1)

고양동주민센터 전경

2. 마을의 변천사
▲고양동
 고양군 사리대면 읍내리 > 고양군 벽제면 고양리 > 고양군 벽제읍 고양리 >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양주군 신혈면 벽제리 > 고양군 신혈면 벽제리 > 고양군 벽제면 벽제리 > 고양군 벽제읍 벽제리 >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벽제리 마을
▲선유동
 양주군 신혈면 선유리 > 고양군 신혈면 선유리 >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 > 고양군 벽제읍 선유리 >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선유동 마을
▲대자동
 고양군 사리대면 대자리 >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 고양군 벽제읍 대자리 >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대자동 마을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옛 고양시의 모습 <자료 = 고양동주민센터>

3. 마을지명 유래
(1) 고양동(高陽洞)
고양동은 고양시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중심 마을로써 고양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인조 때인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시대 각 군에 하나씩 설치했던 국공립학교인 향교(고양향교)가 있고, 지금의 1번 국도에 해당하는 관서대로, 경의로가 함께 지나는 경유지로서 서울과 의주로상 벽제관이 위치해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고양동은 예로부터 고양시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동에 위치한 고양향교는 고양시에 유일하던 국공립교육기관이다. <경기문화재 제69호>

(2) 벽제동(碧蹄洞)
벽제동은 조선 중기 이전부터 쓰이던 지명으로써 벽제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에 대해 세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영조가 많은 한을 품고 죽은 아들인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대자사(大慈寺)를 찾아가던 중 벽제를 지나갈 때,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으며 아름답고 깨끗해 그 때부터 벽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자리(大慈里)에 있는 푸른 연못이란 뜻의 벽지(碧池)가 벽제관 등 전쟁터가 많고 왜군의 왕래가 많아지자 '지(池)'자가 '제(蹄)'자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세 번째는 많은 관리들이 이곳을 통해 중국 북부를 방문했는데, 관리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 큰 소리를 질러서 다른 사람의 통행을 막고, 길에서 비키라는 벽제(辟除)를 자주하여 지명으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벽제관지<사적 제144호>는 조선시대 역관터로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에 세워져 중국의 사절단을 머물게 했던 곳이다.

자연촌락 이름으로는 예술인 마을로 유명한 목암마을은 마을 앞뒤 산에 나무 (木)와 바위 (岩)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퇴패(退敗)고개는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후퇴한 고개라 하여 불려지고 있다. 혜음령(惠陰嶺)고개는 혜음사라는 절이 있어서 불려졌다는 설과 고개가 워낙 높아 여름철이면 넘기가 쉽지 않았는데, 고개 정상에 넓은 그늘이 있어 그늘의 은혜를 입는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상곡은 골짜기 위쪽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 선유동
선유동은 마을의 경치가 뛰어나고, 산세가 아름다워 신선이 자주 놀고 가던 곳이라는 뜻에서 선유라는 이름으로 불러졌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강태공들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낚시를하면서 신선놀음을 했다고 하여 선유리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선유동에 있는 자연촌락인 상산은 마을 가운데 상산봉을 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불미지는 이곳에 큰 절이 있어 미륵보살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미지라 부른다고 한다. 

(4) 대자동
대자동은 조선시대부터 불려진 지명으로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태종이 직접 지었다고 하며, 여기서 대자는 ‘큰 자비를 내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령대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태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런데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무덤 근처에 암자를 세워 불공을 드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자주 행차하기에는 길이 너무 멀고 험난하여 신하들이 만류를 하자 태종은 큰 자비를 내린다는 의미의 대자사를 세워 성령대군의 명복을 빌었다. 이 때부터 절의 이름을 따 대자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다른 한 가지 설은 세종이 눈병으로 고생할 때 신하들의 간청으로 큰 절을 찾아가던 중 산등성이에 이르러 절의 용마루가 보이자 눈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그 절의 큰 덕을 입은 것을 기념하여 대자사라 지어주었고, 마을도 대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연촌락으로 고읍(고골)은 고양군청이 있어 생긴 이름이며, 쌍굴말은 두 사람의 궁녀 무덤에서 유래됐다. 간촌은 마을과 마을사이의 샛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바늘아지고개(針峴)는 고개가 바늘과 같이 뾰족하게 높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용복원은 용두동에서 시작한 큰 산줄기가 용모양으로 뻗어나가는데 이 마을에 이르면 용의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원은 새로이 만들어진 마을이며, 뫼지골은 산 아랫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

4. 마을의 명소
(1) 고양향교(高陽鄕校)
고양향교는 숙종 15년(1689년)에 건립되어 지방교육기관이다. 중ㆍ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양민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이 주요 교육 내용이었다.

고양향교 내에 있는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 경기문화재자료 제69호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33-13 (고양동 306)

(2) 벽제관지(碧蹄館址)
고양동은 오래전부터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로써,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이었다.

벽제관지(사적 144호)는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에 세워서 중국의 사절(使節)들을 머물게 하였던 곳이다.

벽제관지는 조선시대의 역관 터로써 처음 지어졌을 때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옷 고을(고읍)에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1419년)에 중국 사신을 효령대군, 영의정 유정현 등이 벽제관에서 영접했다"는 등의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 외교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벽제관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는 벽제관지. 여러 번 복원을 시도하였으나, 아직도 터만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부가 헐렸고, 6·25동란 때 모두 불탔다. 다만 객관의 문만이 1960년 무렵까지 남아 있다가 무너져버렸고, 지금은 관사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다.

▲ 문화재지정번호 : 사적 제144호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 

(3) 고양동 은행나무 (보호수)
고양동 34번지에 위치한 수령 500년된 은행나무는 수고 24m,  나무둘레 6.7m에 달는 보호수이다. 조선시대 고양관아에 부임된 어느 원님이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언뜻 보기에 1그루로 보이지만 나무 밑둥으로부터 2m 지점을 보면 2그루가 각각 나뉘어져 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은행이 열리는 튼튼한 나무로 일명 향교골 나무로도 불린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년인 은행나무

▲ 보호수 지정번호 : 경기-고양-12
▲ 지정일자 : 1982년 10월 15일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317-6 (고양동 349-1)

(4) 고양동 송덕비군(訟德碑群)
고양동 송덕비군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군수 및 관찰사, 면장의 선정(善政)과 치적(治績)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들이다. 송덕비의 주요 재료는 화강감이나 오석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비신, 옥개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7개의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고양동 송덕비군은 벽제관지 부근 도로 옆에 위치한다.

▲ 송덕비군 구성 :  ①군수 정진묵 애민선정비 ②관찰사 이재원 영세불망비  ③군수 유시중 청덕선정비 ④군수 최창대 선정비 ⑤군수 영사비 ⑥군수 홍진유 정덕애민 선정비 ⑦면장 신규선 치적비
▲ 찾아가는 길 :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235-1 (벽제관지 터 앞)

(5) 고양동 느티나무(보호수)
고양동 느티나무는 수령 500년, 수고 20m, 나무둘레 3.4m로 조선초 한양과 중국을 연결하는 관서대로(연행로)변 벽제관지 앞쪽에 위치해 있다. 이 느티나무들은 성종 7년(1476년)에 새로운 벽제관을 증축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 심은 것이라 한다. 나무 앞쪽에 공덕비들과 함께 고양의 역사를 보여주는 나무이다.

성종 7년에 심은 고양동 느티나무

▲ 보호수 지정번호 : 경기-고양-13
▲ 지정일자 : 1982년 10월 15일
▲ 찾아가는 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235-1 (벽제관지터 앞)

(6) 중남미문화원
중남미문화원은 1992년 중남미에서 30여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이복형 대사와 그의 부인인 홍갑표 이사장이 그 지역의 풍물을 모아 세운 문화의 장이다. 일반인에게 아직은 낯선 중남미 지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청소년들에게는 세계화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꿈과 이상과 건전한 세계관을 심어주기 위한 취지로 건립되었다.

중남미의 이국적인 풍경이 멋진 중남미문화원은 고양동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1994년 건립)에는 중남미의 대표적 문화인 마야, 아즈텍, 잉카 유물 등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고, 미술관(1997년건립)에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 찾아가는 길 : 고양시 고양동 302-1

5. 현대의 고양동
현대의 고양동은 고양동주민센터가 위치하고 있고, 초등학교와 상가, 기관이 몰려 있으며 ▲파주 ▲양주 ▲서울 ▲원당 ▲의정부 등으로 이어지는 호국로가 지나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과 아파트 단지가 한 풍경에 담겨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조용한 전원마을과 장미 등 화훼가 발달되어 있어 농촌 마을로 이루어진 선유동, 다양한 문화재와 통일로가 지나면서 교통량이 많은 대자동, 파주시와 인접하고 대형아파트 단지와 빌라가 들어선 도시와 농촌이 함께 형성되어 있는 벽제동 마을이 어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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