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교사로서 학생들과 교실에서 만난 지 19년 째.

내년이면 2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이 되면 두렵고 떨린다. 아직도 수학은 교사인 나에게 언어로 다가오지 않는다.

수 천 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형성되어 왔고 계속 변화해가는 수학을 교실에서 정형화된 틀(교과서, 문제집 등)의 형식으로 학생들과 만나며 수학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사연들을 함께 충분히 공감하기도 전에 결과적 지식의 형태로 전달되는 과정이 수업과정 중간 중간 자리 잡고 있다.

몇 해 전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 집필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극한 부분을 맡았다. 기원전 250여년 경 무렵에 살았던 그리스의 한 수학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언어화, 기호화되는 과정을 통해 다듬어진 극한의 개념을 20여 페이지의 지면에 담아야 했다. 교과서 본문을 작성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방 이후 60여년의 기간 동안 줄곧 배워왔던 내용에 대한 정해진 내용을 토대로 한 수정작업이었기에 원고는 금방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집필하는 과정 내내 내 생각의 한 구석에는 극한이라는 수학의 중요한 개념을 학생들이 교과서 내용만 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점점 커져갔다. 사고는 내적인 호기심과 직관적인 감각 그리고 애매모호함의 혼돈과정을 거쳐 언어화, 기호화의 단계를 거쳐 명징의 상태로 진행되어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치는 것 아니던가? 더군다나 무한의 영역은 아직도 계속 연구가 진행 중인데 말이다.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무한의 개념을 충분한 사고과정 없이 단순한 결과적 지식으로 수동적 방법으로 개념을 받아들이며 문제 풀이에만 익숙해진다면 생각의 폭이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하물며 이 내용이 충분한 사고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중학생들에게 제공된다면 어떨까?

그러한 예를 소개해 본다.

중학교 2학년 유리수와 순환소수의 단원에서 순환소수의 분수 표현의 내용을 다룰 때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순환소수  를 분수로 나타내어라.’라는 문제의 풀이를 보면,

   라고 하면

 ①

 ②

②에서 ①을 변끼리 빼면 

즉,  이다.

라고. 이 내용은 무한의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내용의 경우 러시아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다룬다. 극한의 개념을 이해한 후 접근하는 것이 사고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의 경우는  를 로 놓으려면 가 수렴하는 수열 즉 공비가 이며 1로 수렴하다는 전제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무한을 다루기에 그러하다. 하나의 개념이 교과서에 들어오고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까지 실제로 인류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 문학관에 있는 김삿갓 동상.

그가 전국을 떠돌던 때에 바닷가에 사는 한 지인의 회갑연에 초대를 받았다. 자식들이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비는 시를 부탁하자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可憐江浦望 (가연강포망) 강에 나와 그 경치를 살펴보니

明沙十里連 (명사십리연) 유리알 같은 모래가 십리에 걸쳐 있구나.

令人個個捨 (영인개개사) 모래알을 일일이 세어보니

共數父母年 (공수부모년) 그 수가 부모님의 연세와 같구나.

이 시의 소재는 모래알인데,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87? ~ BC 212)는 지구상의 모래알의 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지구상의 모래알의 개수는 유한하며, 그 개수는 ‘제7의 옥타드 천 단위’수보다 적다”

김삿갓은 이 세상의 모래알의 수를 무한으로 보고 그 개수를 세는 방법을 칸토어(G. Cantor, 1845-1918)가 무한집합의 개념을 만들 때 사용한 ‘일대일 대응’의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김삿갓은 극한의 개념을 명확하게 배우거나 알지 못했다. 생각의 시작은 늘 그렇다. 하지만 김삿갓이 표현한 이 시의 내용은 다분히 수학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이 수학적 사고와 만나는 과정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사고 내면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면 수학은 우리와 늘 가까이에서 쉽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수학을 좀 더 역사적으로, 인문학적으로 학생들에게 다가서야 할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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