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뒤를 따랐다. 뒷짐 지고 윗마을로 오르시는 할머니께 차순태 어르신 댁을 여쭈었더니 할머니께서 “순태, 그니 집은 이짝 골목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 언덕 집이여” 여든 일곱의 어르신을 순태라고 부르신다. 그렇다면 할머니도 동년배이거나 손위 누이 쯤 되는 분이다. 무수한 세월을 같이 걸어온 이웃들이다.

어르신 댁 방문을 열면 흑백사진 속의 부부가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차순태 어르신의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다.

뭉클한 마음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곁눈으로 어르신의 눈에 맺힌 이슬을 보고 말았다. 여든 일곱의 ‘노인’도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적신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존재는 떠난 뒤에 더 애절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생전에 효도하라’고 누누이 대물림처럼 말하고 있다.

■ 차씨네 집성촌, 속 깊은 부모님 슬하의 청년기

우리 상중리는 첫 번째 마을 신대 새터 말, 두 번째 하능 아래 능골, 세 번째 상능 윗능골, 네 번째 분토골, 다섯 번째 안동오리, 정이 뚝뚝 묻어나는 이름들을 갖고 있다. 나는 그중 두 번째 마을 하능에 살고 있다.

차 씨 할아버지가 100년도 넘는 그때 상중리 골짜기에 터를 잡았다. 그전에는 강 씨들이 많았고 지금은 차 씨들 집성촌처럼 오고가는 이들이 차 씨 일가이다.

아버님은 차소석, 어머니는 한금옥. 아버지는 인정 많은 분이었고 어머니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주저하지 않으셨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집이 먹고 살만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일가라고 생각하고 함께 잘사는 방법을 모색한 분이다.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직접 염을 해서 명복을 빌어주기도 하셨다.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아버지는 기꺼이 하셨다. 큰 병 걸린 사람이 생기면 동네에서 십시일반 모아서 대전 박외과까지 데려가서 수술받게 하셨다. 그 옛날에 보험이 있기를 하나. 시골에 번듯한 병원 하나 없던 시절이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손길들을 아버지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모았다. 어느 집은 쌀을, 어느 집은 보리를, 형편이 좋은 집은 몇 푼이라도 같이 보탰다. 아버지는 이웃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손수 보여준 분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어려운 이웃들 챙기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에 도움의 손길을 보태기도 했다. 고향을 지키면서 농사짓고 그 일들을 했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인정받았을 텐데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부평초처럼 객지로 다녔던 그 시간이 회한으로 밀려오기도 한다. 나도 잘살아보겠다고, 큰물에 나가면 또 다른 기회가 있을까, 궁리하는 마음으로 떠났던 시절이다.

피 끓던 내 마음을 어머님은 온전히 다 이해해주실 수 없어 아들이 고향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속앓이만 하셨다.

안방에 걸린 사진만 쳐다보면 눈물이 난다. 노랫말처럼 ‘불효자는 웁니다.’

사진을 보면서 수시로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를 하고 있지만 떠난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 부모를 향한 마음이다.

어머니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직장 근무 중에 돌아가셨다고 비보를 듣게 돼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혼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죄스러운 마음을 달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 멀고 먼 길, 다시 올 수 없는 그 길을 어머님이 혼자 떠나시느라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 97살, 당시 연세로는 장수하셨지만, 부모상에 호상은 없다고 애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하 세월이 걸렸다. 아마도 불효자로 살아온 내 설움이 더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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