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 어르신
김정자 어르신

1946년 김정자

옥수 지업사의 미닫이문이 빼꼼 열렸다. 사모님은 자동으로 커피포트의 전원을 켰다. 손님 맞을 준비가 됐다는 신호다. 옥수 지업사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가 누구라도 기분 좋은 대접을 받는다. 옥수 지업사 사모님은 손님에게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일면식이 없는 낯선 이도 한결같이 따스한 미소로 맞이한다. 그리고 이내 열다섯 평 남짓, 작은 공간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 언제나 열려있는 문 그리고 마실 거리

우리 가게는 커피를 비롯해 녹차 둥굴레차 메밀차를 손님 입맛대로 고른다. 빛바랜 냉장고의 문이 열리면 에너지드링크가 들어있는 작은 박스들과 단맛 나는 탄산음료, 톡쏘는 맛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된 오렌지주스와 양파즙 호박즙 봉지가 보인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고르면 된다. 시원한 것을 싫어하는 손님에게는 따뜻하게 보관해둔 쌍화탕을 한 병씩 꺼내준다. 뭐든 아낌없이 무엇이든 나누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음료병에도 담겼다. 내가 채우지 않아도 우리 냉장고 안이 좀처럼 비어 있는 경우는 없다.

세월은 어쩔 수 없어 깜박깜박하니 냉장고 안은 마실거리로 가득찼고 냉장고 벽면은 작은 약봉지 열댓 개를 테이프로 붙여 매달아 놓았다. 약 먹는 것을 깜빡 잊고 나온 날에도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자는 생각이었다. 줄줄이 달아놓은 모습이 생경한지 손님들이 쳐다보곤 한다. 나는 빙그레 웃고 말지만, 이제는 약 없이는 못사는 나이가 되었다는 신호다.

■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 44년 된 옥수 지업사와 이별 준비를 하다

44년 전 가게문이 열리면 겁부터 났다. 가슴이 두근두근...

“어서오세요”

라는 모기만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두어 달은 족히 걸렸다. 40여 년 전 가게부터 얻어놓고 무엇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에 지인의 조언으로 남편은 지업사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가게를 맡겨놓고 출근한 남편을 대신해서 수줍게 손님을 맞이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4년이 흘러갔다. 세월따라 닳아버린 미닫이 출입문과 벽지를 쌓아놓은 낡은 선반처럼 나도 나이들고 있다. 남편의 얼굴에도 지난 시간이 쌓인 골 깊은 주름이 보인다.

이원 살던 큰 애기 정자, 하루 두 끼는 제대로 먹던 친정이라 가난이라는 올가미는 뒤집어 쓰지 않아도 되었다. 집안 살림도우면서 어느덧 스무 살을 넘기고 있었다. 청년 유길종과 수줍은 첫 만남.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날, 친척집에 들렀을 때 방안으로 불쑥 들어선 남편이 나를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대전에 있는 양장점에서 맞춘 한복을 입고 친척집에 방문했다. 치마길이가 발목 가까이 닿는 까만색 치마저고리였다. 바지를 입거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짧은 치마를 입으면 부모님에게는 물론 동네 어른들에게도 혼구멍이 나는 시대였다.

그때 나는 선을 보일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머니댁에 찾아갔는데 남편은 당일날

“친척 처자가 우리 집에 와있으니 얼굴을 보고 가라”는 뒷집 형님의 갑작스런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방안으로 불쑥 들어선 남편은 나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인상이 온화했다. 남편은 44년간 내내 인상 좋은 사람으로 불리었다. 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부드러운 겉모습의 내면에는 처신을 신중하게 하는 우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곤란할 때는 도와주고 은혜를 입은 것이 있으면 잊지 않고 몇 배라도 갚아주는 성격이다.

결혼 전 남편은 남의 집 송아지를 키워주고 팔아서 나누어 가진 돈으로 자기 소유의 송아지를 사고 그 송아지를 키워서 어미 소가 되면 어미 소를 팔아서 두 마리의 송아지를 사와서 길렀다. 그리고 그 송아지 두 마리가 어미 소가 되었을 때 팔아서 땅을 사고 집도 지었다고 한다. 맨손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이룬 남편이 존경스럽다.

남편이 마련한 돈으로 지은 집에서 우리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책임감 있는 남편은 나와 지업사를 하면서 아이들 교육도 잘시켰고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을 만큼 경제적인 안정도 누리며 살게 해 주었다. 물론 나도 내조 그 이상의 한몫을 톡톡히 해낸 것도 사실이다.

나보고 이웃들이 “장사가 잘되는데 건물을 사지 않느냐” 수시로 물었다. 우리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1980년대, 경기가 호황일 때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손품 발품을 팔면서 장사를 했던 이유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다 못한 마음의 응어리가 있어서

아이들은 유학 보내면서 원하는 공부를 다 시켜주었다. 그때는 건물주가 되는 것보다 아이들 공부 시키는 것이 우리 부부 삶의 목표였다.

큰 아들이 유학 가고 남편이 대전으로 유학비를 부치러 나갈 때는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그 돈이 우리 부부의 땀방울이 모인 돈이고 우리 아들의 미래가 걸린 돈이라

무사히 돈을 보내고 돌아와야 겨우 밥숟가락을 뜰 수 있었다.

■ 옥수 지업사의 호황기, 독식이 아닌 함께 잘살기를 바라며

40여 년 전 처음 지업사를 열었을 때 남편이 직장에서 쌓아 놓았던 신뢰 덕분에 여러 사람이 고객이 되어 주었다. 장사가 물이 올라서 나 혼자는 가게일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바빠졌을 때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내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우리가 마진을 조금 덜 남기고 손님들 편해서 장사를 하려니 덤핑장사라는 이름을 붙여 따돌리면서 대리점 영업사원에게 물건을 대주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벌어졌다.

물건은 넣어 주지도 않으면서 미수금은 모두 받아가려고 하는 대리점 직원이 얄미워서 사거리까지 쫓아가서 둘둘 말은 벽지로 등짝을 후려치기도 했다. 내가 분노를 표출하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나와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탐내본 적은 없다. 우리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었던 대리점 사장님의 도움으로 일이 잘 해결되었고 다른 지업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지업사끼리 계모임을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런데 네 집 중에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한집을 제외하고 세집만 모여 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모두 함께 모임을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업하다보면 간 쓸개를 다 내어놓아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고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랴. 그때마다 지혜롭게 이겨내면서 잘 지나온 덕분에 지금까지 옥수지업사는 건재하다. 난처했던 상황들도 모두 지나가고 이제 와서 돌아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몇 편의 그림처럼 내 기억 속에 잔잔하게 남아있다.

화목한 가족 사진
화목한 가족 사진

■ 나는 동네 사랑방의 안주인으로, 남편은 밥값 내는 인심 좋은 어른으로

옥수 지업사의 소비자는 공장이나 큰 거래처가 아니면 대부분이 여자 손님들이다. 남편이 여자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식사 대접도 하고 거리낌 없이 친하게 대할 때도 나는 이해를 했다.

남편은 어떤 손님이 와도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이다. 그리고 남편의 마음이 곧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남편을 신뢰한다.

남편이 나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한 가지는 여자 손님들에게 특별히 친절해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믿어주고 이해해 준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자 고객이나 기사님들을 대할 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없을 때 남편의 친구들이 와도 모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방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이웃이며 친구다. 날씨가 더워져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제 동네 사랑방이 된 우리 가게. 미닫이문 안으로 교장 선생님 내외분이 들어서고 있다. 마침 점심식사 때라 남편은 “삼계탕이나 한 그릇 하러 갑시다”라고 말을 건넨다.

남편은 항상 밥값을 낸다. 지갑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 노년의 여유가 찾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우리 부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자존심을 지키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함박웃음을 머금고 동네 사랑방의 주인이 되어 서로를 위로하고 가게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은 무조건 반갑게 맞을 수 있다.

빚진 것도 없고 남에게 해코지한 것도 없으니 그저 웃으면서 “어서와요” 이제 여든이 될 시골 할매가 이만하면 족하지 뭘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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