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무(1937년~)②, 고생문이 닫히기 시작한 건 아내 덕분
이종무(1937년~)②, 고생문이 닫히기 시작한 건 아내 덕분
  • 고양일보
  • 승인 2022.07.1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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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단지 아내, 고생문이 닫히기 시작한 건 아내 덕분

25살에 중신이 들어와서 박정순과 결혼을 했다. 아내는 보물단지다. 아내는 회남에서 시집을 왔는데 내가 약시인줄 모르고 시집을 왔다. 중신애비가 어릴 때 눈을 다쳤다고 지나는 말처럼 전한 통에 적당히 보이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결혼 전에 약혼 사진 찍던 날 처음 아내와 대면했다. 나는 25살 아내는 22살, 목단꽃처럼 예쁘고 참하던 아내. 우리 집에 와서 어색한 첫 만남을 하고 대전 나가는 버스를 집어타고 시내에 나가 약혼 사진을 찍었다. 둘 다 뻘쭘한 사진이지만 그 부끄러운 만남 후에 1962년 10월 달 한창 좋은 날씨에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낳았다.

아내는 시집와서 보니 아마 기가 막혔을 것이다. 둘째 며느리인데 20여 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결국 대소변 수발까지 다 해내고 시력을 잃어 변변한 능력 없는 서방에, 아이들 키우느라... 거기에 방직공장의 근로자로 일하면서 1인 5역을 해냈다. 너무 고마운 아내다. 묵묵히 살림도, 직장생활도, 시어머니 봉양까지 잘해준 아내. 신사임당이 따로 없다.

1969년 무렵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외딴집 철거 비용으로 받은 17만원으로 집을 지어서 우리 살림을 시작했다. 나는 약시에 특별한 기술이 없어 공사 현장에서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부 고속도로 현장에도 나가서 낙반 사고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아찔한 경험도 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지난날을 다시 기억하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열심히 살았던 추억으로 그 날들을 마음에 새겨본다.

가진 것 없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와의 약속을 만들었다. 술 담배 안하고 그저 하루 일당은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매일 용돈을 타서 쓰기로 했다. 아내와 같이 허리띠 졸라매면서 열심히 살고 한 푼 두 푼 모았다. 아내가 계도 야무지게 하고 저축도 하면서 차곡차곡 모았다. 그때는 계가 많아서 곗돈 사고도 많았는데 우리는 다행히 그런 불상사가 없었다.

이제 허리는 굽었지만, 나라에서 노인들을 챙겨주고 자손들도 알아서 자기 밥벌이를 하니 걱정이 없다. 우리 부부는 배움도 가진 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우리 3남매는 남들만큼 배우게 하고 사회에서 어엿한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고 있다.

나 같은 촌 노인의 후손 중 박사가 셋이나 된다. 감격스럽고 고마운 우리 새끼들이다.

끼니도 제대로 못 먹던 그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부자가 된 것 같지만

내 인생에서 구원의 여인인 아내도 3년 전 먼저 선산에 자리를 잡았고 친구들이 하나둘 먼저 이승을 떠나서 곁을 지키는 벗이 없는 허전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다.

■ 쌀독 빌 걱정 없는 감읍한 매일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우두커니 앉아 버스에서 오르내리는 사람,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몇 시간씩을 보내기도 한다. 심심해서 소일거리인양 자리 잡고 앉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재미가 쏠쏠하다. 모르는 이들은

‘저 노인네가 저기 앉아 뭐하나?’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는 그 맛을 누가 알까.

뭐든 계속하면 새로운 게 보이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아들이 내년 2월이면 은퇴를 한다. 은퇴 후에 바로 시골로 내려온다고 아들 내외가 주말마다 와서 집안 구석구석 꾸미고 다듬고 있다. 같이 살지 않아도 힘이 난다.

서울에서 60년 넘게 산 며느리가 작은 시골 마을에 와서 어찌살지 염려도 되지만 마음이 갸륵하다.

궁핍한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호사를 누린다. 쌀독 빌 걱정이 없고 내 건강만 지키면 된다. 작은 동네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다보니 큰물에 나가 대업(大業)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업을 이룬 사람은 작은 시골 마을의 범부(凡夫)로 살았던 락(樂)을 모를 것이다.

이만하면 족하고 자존심을 지켰다. 물론 모든 건 먼저 간 고마운 아내 덕분이다. 지팡이가 친구가 되어 다니지만, 언젠가 지팡이 잡을 힘도 없어지는 그 날이 온다면 저녁을 먹고 꿈속에서 아내를 만나러 가고 싶다.

언제 일이 모르는 그날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으로 맞을 채비를 할 수 있게 된 지금 노년의 나는 슬프지 않다.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귀한 손님’이다.

매일 세수를 깨끗이 하고 정갈하게 ‘귀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쌓으면 된다. 그럼 또 그 매일 매일이 빛이 날 것은 자명하다.

<자녀 편지>

아버님께...

첫째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끼시던 제 돌 사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두 분이 한창 고생하시던 때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낳고 두 분이 더 힘내서 살게 되셨다고 특히 아껴주시던 사진입니다.

아들 돌 사진
첫째 아들 돌 사진

아버님만 고향에 두고 서울에 나와 있는 저희들은 늘 죄송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막일을 하시는 아버지, 공장에 다니시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모르고

오히려 제 자신이 떳떳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저희들 3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내주시고 저와 조카들이 박사가 되어 아버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이제 환갑을 넘기고 나서야 아버님의 인생을 조금 이해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어린 날의 불상사로 평생 약시로 사셨던 아버님의 애통함도 몰랐습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지팡이를 잡고 걸어가시는 아버지 뒷모습만 보아도 그저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도 은퇴가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은퇴한 후에는 하루도 망설이지 않고 고향으로 바로 내려가 아버님과 같이 살 것입니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고향집을 지켜주세요.

아버지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아버님의 고생이 저희들의 안락함을 낳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씨가 더워집니다. 여름에는 특히 찬 음식 드시지 마시고 땡볕에는 나가지 마셔요. 이번 주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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