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자 어머니(1942~)
홍순자 어머니(1942~)

무명천에 핀 목단 꽃

“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

“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 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 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

충청북도 오송이 고향인 나는 지금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줄곧 말한다. 고향마을은 산도 멀어서 나무하거나 나물 뜯으러 가려면 20리를 걸어야 했다. 남정네들은 큰 숨을 몰아서 산에 올라 지게에 나뭇짐 얹어서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여인네들도 두 말하면 뭐할까, 헌신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기회가 단절되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아왔다. 오송 강외 초등학교를 나와서 청주여중을 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많았지만, 형편이 안되니 중학교에 다닌 것만도 친정어머니 덕분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안가셨지만 총명하셔서 글도 읽고 편지도 쓰셨다. 어머니 덕분에 교복이라도 입어보았다. 나를 공부시켜준 우리 어머니는 내 평생 은인이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나? 내 나이 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없는 살림에 남편의 부재로 어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은 굳이 말로 드러내기도 가슴이 시리다. 당시만 해도 돌림병이나 홍역이 많아서 동네를 한번 휩쓸고 가면 온 식구가 줄줄이 꽃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히기도 했다. 동네에 곡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시골 산자락에 유난히 애기 무덤이 많았던 슬픈 기억이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그 길을 지나려면 뒷목이 쭈뼛거려 오금이 저렸다.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아 두려움으로 꽉 찼다.

어렸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할머니께서는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만 입혀서 부엌 아궁 앞에 세우셨다. 바가지에 굵은 소금을 담아 한 줌씩 온몸에다 뿌려 주시고는 부엌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려 주셨다. 아이고, 쓰리고 아파라.

“철모르는 아무개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합니다. 삼신님께서 깨끗이 낫게 해 주십시요”주문처럼 말씀하시면 2~3일 후에 언제 낫는지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미신 같지만, 그 시절엔 믿고 살았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학질이나 돌림병에 걸려서 열이 높아 사경을 헤매도 용한 할머니를 모셔 갔다. 마을에 돌림병이 생기면 할머니도 바쁘셨다. 이집 저집 불려 다니시며 돌팔이 의사 역할을 하셨다.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다. 돌잔치, 백일잔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돌림병에서 목숨 건졌다고 잔치를 벌였다. 나도 학질이 걸려서 학교도 두 살 더 먹어서 들어갔다. 결핍 투성이었던 유년의 기억은 우리 동년배들은 니나 내나 다들 마찬가지다.

학창시절의 모습
학창시절의 모습

몸은 고단했지만 야무진 큰 애기, 순자

중학교 졸업하고 엄마랑 동생하고 신탄진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철도국에 다녔는데 신탄읍내서 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친척 동생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살림도 도왔다. 상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린 마음에도 잘 보이고 싶어 눈치도 빠르고 뭐든 잘했다. 할머니가 예뻐하셔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마음은 그리 고달프지 않았다. 신탄진역은 노리까에(환승)역이라 기차가 한 시간 정도 멈췄다가 갔다. 손님들이 내려서 시장보고 끼니도 채우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면 많은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로 얼음을 탕탕 깨고 양잿물로 미리 애빨래를 한다. 양잿물은 짚풀을 떼서 만들었는데 비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려니 손은 마디마디 아렸고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애꿎은 빨래 방망이만 연신 두들겨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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