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노란 한복을 입은 이순희 어르신
딸과 함께, 노란 한복을 입은 이순희 어머니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낙화유수 네 글자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어여쁘던 꽃이 물위로 진다.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은 어디로 갔나

이순희 어머님이 소녀시절부터 잘 부르시던 남인수 선생님의 ‘이 강산 낙화유수’ 노랫말이다. 어머니께서 세월의 질곡과 무게를 알기 전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노래였다. 당신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열 살 무렵 무심코 흥얼대던 노랫말처럼 인생이 흘렀다. 질곡의 삶을 견뎌내고 이제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다운 황혼을 만끽하고 계신다.

점심 선약이 있으셔서 짧은 시간 들려준 어머니의 이야기는 노을처럼 지고 있지만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재능기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이순희 어머니
재능기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이순희 어머니

운명이라는 올가미

남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 나를 보듬고 챙기기에는 본인 마음의 짐이 더 컸다. 남편은 회오리바람 같은 청년기를 군에서 보내면서 가정은 등한시 하고 겨우 3,500원이던 월급도 제때 주지 않아서 나는 생면부지 강원도에서 젖동냥까지 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지 젖이 나오지 않았다.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젖동냥하는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내 운명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안개 속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힘든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연년생으로 아기가 생겨 어머니가 우리 큰애를 데리고 갔다. 외갓집에서 큰 아들이 성장해서 어머니도 힘들고 간간이 친정 가서 아들을 보면 우리 아들이 할아버지로 뒤로 숨으면서 나를 어려워할 때는 마음이 다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손자가 안쓰러워서 밥이 식을세라 밥그릇도 품속에 품었다가 먹여주셨다. 멀쩡한 부모가 살아 있음에도 할아버지랑 소풍을 다녀야하는 아들의 마음에 일었던 파문을 진정시켜주지도 못했는데 이제 환갑을 훌쩍 넘은 우리 아들은 부모를 잘 챙겨준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남편은 어느 날 발가벗겨서 담요에 쌓인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를 보니 어찌나 불쌍한지 원망도 미움도 없이 그저 딱하고 또 딱했다. 진위여부는 둘째 문제, 그저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키울 생각이었다. 그 일로 남편은 군 생활에도 위협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움을 요청하고자 친정으로 가는 길은 혀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모의 도움으로 한고비 넘기게 되었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다시 강원도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새 아이가 없어져 절규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으로 인해 기구한 운명의 덫에 걸린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비단 우리 영감님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남정네들은 어쩌면 그리도 무심하고 여인네들 속을 다 타버리게 만들었는지...세월이 야속해서 힘든 시절을 살다보니 남자들은 내 설움 니 설움 술로 위로받고 순간순간에 원치 않은 일들에 휘말리곤 했다. 그러려니 하기엔 너무 힘든 나날이었지만 나는 한고비 한고비 넘기며 살아내고 있었다.

결국 내 운명은 내가 열어야 한다는 결심을 낳았고 돈벌이 일터에 나가야 했다. 도로공사 현장에서 박스에 흙을 하나 채우면 표를 하나 준다. 밀가루 배급받을 수 있는 표였다. 쌀집마다 외상값 있어서 도로 위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밀가루를 얻어 겨우 끼니를 때웠다.

학생들 하숙도 쳐보았고 과수원에 가서 나무도 잘라주고 벽돌도 져서 나르면서 품팔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에 해삼 팔러 오는 아주머니가

“삼을 받아서 한 번 팔아보라”

고 권하기도 했다. 몸이 힘들어도 가리지 않았다.

화장품 외판원을 하면서 돈을 좀 만져보기도 했다. 구루무만 바르던 여자들 보다 요정 아가씨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짭짤한 수입이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안 해본 게 없는 여자다.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부채 의식이 있어 몸이 힘들어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지역 실버 기자단으로 활동하시는 어머니
지역 실버 기자단으로 활동하시는 어머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관광업을 하던 남편과 노년을 보내고 있다. 몸이 불편한 남편은 내 젊은 날 나를 담금질 시켰지만 나는 그니의 동반자로 해로 하고 있다.

운명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받아들이고 또 그 과정에 연민이 싹트고 그리고 동행을 하게 된다.

모든 부부가 사랑의 운명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숙명 앞에서 측은지심으로 함께 하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인연이다. 나는 거기에 순응했다.

이제 8학년 6반이지만 아직도 노다지 외식하기 바빠서 우리 영감님한테 미안하기도 하다.

나이 들어 사회활동도 많이 하고 소녀시절 못 이룬 꿈들을 나이 들어서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여든이 넘은 나를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이렇게 편안한 노년의 안식이 찾아오다니...

휴...

그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