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어르신
1953년생 김종철님

[고양일보] 아직은 선로 위를 달리는 ‘인생 열차’ 승객, 식당 칸에서 창밖 풍경을 그리다.

김 선생님에게는 노신사라는 낱말도 나이라는 숫자로 매겨지는 한정된 단어다. 패션 감각으로도 한 몫 하시는 김종철 선생님은 70년의 세월 속에서 때론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자리매김하셨다.

70년의 성상을 쌓으신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속에 시골 동네에서 가장 먼저 도시 중학교로 진학하셨던 추억, 산업역군이었던 청년시절이야기, 그림과 서예, 인문학적 소양의 시간을 쌓으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잘 살아 오신 지난날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이면에는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을 반드시 담보로 한다.

선생님도 어느 한 시절은 사통팔달의 길에서도 서성거려 보셨다. 그 속에서 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거나 또 다른 갈래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해답을 찾는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조연으로 단역으로 역할을 배정받는다. 아직 인생 무대에서 내려오기엔 매력적인 미남 배우 김종철 선생님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중 회억 몇 페이지를 들춰보자.

은퇴후 수묵화 매력에 푹 빠지다.
은퇴후 수묵화 매력에 푹 빠지다.

산업역군,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 청춘을 심다

대학에서 화공과를 졸업하고 한국타이어에 입사를 했다. 우리 때는 산업화의 물결이 태동하던 때라 실력이 있으면 여러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아 회사를 골라서 가던 호황기의 시작이었다. 한국타이어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타이어 시장의 비전을 바로 습득했다.

45년 전 그때만 해도 대단한 집에서나 차를 소유했던 시대, 향후 자가용이 집집마다 생필품이 되는 시대가 온다고 타이어는 그중 가장 번성한 사업이 될 것이라는 전망, 그때는 먼 미래의 비전 같은 구호였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한집에 식구 숫자만큼 차량이 늘어난 시대를 만나 타이어 사업은 가속도가 붙었고 자동차는 생필품이 되어 내내 호황을 누린 사업이다.

은퇴 후에도 고무 관련 사업을 12년간 경영하면서 보은 공장을 오갈 때마다 옥천이 마음으로 눈으로 들어와서 결국 옥천에 터를 잡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한 달에 하루 쉬면 다행이었다. 일요일 아침 6일간의 피로를 덜어낼 요량으로 소파에 누워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을 온 몸으로 맞았다. 때마침 울리는 띠리링 전화 벨소리 “김과장 뭐해? 출근 안해?”

현역시절 일본 출장 중 일본 00타이어 회사 엔지니어와 함께
현역시절 일본 출장 중 일본 00타이어 회사 엔지니어와 함께

이런! 부장님은 벌써 회사에 나오셨다. 휴일도 없이 일하던 그 시절이 고단했지만 돌이켜보면 심장이 뛰던 절정기였다. 요즘 청년들을 생각하면 일자리가 없어 삶에 지치고 두 평짜리 고시촌에서 시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지 더 어렵던 시절의 우리가 성장가도를 달린듯하다. 현역시절 관리자는 루틴한 일도 있지만 찾아서 퍼포먼스를 내야한다. 부레 없는 상어처럼 일하던 그 시절로부터 멀리도 왔지만 가장 뜨겁던 시절이다.

일본의 00타이어회사와 기술 제휴를 할 때였다. 일본은 우리보다 20년 정도 기술이 앞섰다. 타이어 기술은 무궁무진하다. 고무를 부위별로 디자인하고 지면에 닿는 부분은 빨리 닳으면 소비자가 거부하고 너무 늦게 닳으면 회사의 경제성이 떨어진다.

고무는 다 그레이드가 다르다. 일례로 기름과 고온을 견디는 내구성이 다르고, 열대지방과 시베리아에 수출하는 타이어가 다 다르다. 하중에 잘 견디면서도 디자인이 좋아야 하고 가공 기술도 뛰어나야 한다. 일본 00타이어 회사에 기술을 배우러 일본 출장을 수십 번 넘게 다녔다. 기술 제휴를 한들 아주 디테일한 기술은 노출을 안 시켜서 그 기술을 빼내느라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그 현장에서는 애국심까지 분연히 타오른다. 늘 승승장구일수 없듯이 책임자로 있을 때 금산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1년 만에 설비와 생산을 차질 없이 복구시키느라 진을 다 빼기도 했다. 물론 징계를 받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 이후로 퇴사하고 관련업으로 보은에서 고무가공 회사를 12년간 운영하다가 현역에서 최종 은퇴를 했다. 이제 자유인이 되어 요일별로 다양한 배울 거리를 맛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행복의 역산(逆算), 이제 나의 행복으로부터 더불어 타인의 행복까지

우리 동네 복지관에서 하루는 전화가 와서 “선생님 친구분 소개시켜드릴게요”하더니 남자분 두 분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또래의 외지인들 중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너무 훌륭했다.

한 친구는 미국에서 40년간 이민생활을 접고 한국이 그리워서 옥천까지 왔고 한 친구는 서울에서 가구사업 하다가 옥천으로 귀촌을 했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청춘을 보내고 옥천에서 새로이 친구가 되었다.

수묵화 수강 중 직접 그린 대청호주변
수묵화 수강 중 직접 그린 대청호주변

수묵화를 배워서 ‘월류봉’의 풍경을 내 손으로 그려서 거실에 걸어두었다. 기쁨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다른 수업도 재밌지만 수요일 수묵화 수업 날이 가장 행복하다.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을 하는 내내 웃고 즐긴다. 햇수로는 3년째인데 너무 재밌다. 유화는 덧칠을 계속하고 말라야 다음 작업으로 들어가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에 수묵화는 금방 마르지만 수정이 어려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붓을 놀려야 한다. ‘그림’을 ‘인생’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그림속에서도 인생을 배운다. 그림은 소재가 중요해서 노는 날에는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나서고 간 길에 맛 집에도 들러 여행의 맛까지 더불어 얻어온다. 요즘은 2년째 접어든 명리학 강의에 큰 재미를 붙였다. 배움은 끝이 없고 내내 기쁨을 준다.

김형석 교수님이 저서 ‘100년을 살다보니’에서 60대-75세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맞습니다.”라고 응수할 수 있으니 지금이 두 번째 인생의 황금기이다. ‘착한 이기주의자’가 되어본다. 나를 제쳐두고 주변부터 행복하게 해주는 역할보다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그 기운으로 주변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더불어 복된 삶이다. 행복의 역산(逆算), 이 공식에 대입하는 하루를 시작하며 차 시동을 켠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