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1953년생 김종철, 아직은 선로 위를 달리는 인생열차 ①
[자서전] 1953년생 김종철, 아직은 선로 위를 달리는 인생열차 ①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2.04.1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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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선로 위를 달리는 ‘인생 열차’ 승객, 식당 칸에서 창밖 풍경을 그리다

김 선생님에게는 노신사라는 낱말도 나이라는 숫자로 매겨지는 한정된 단어다. 패션 감각으로도 한 몫 하시는 김종철 선생님은 70년의 세월 속에서 때론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자리매김하셨다.

70년의 성상을 쌓으신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속에 시골 동네에서 가장 먼저 도시 중학교로 진학하셨던 추억, 산업역군이었던 청년시절이야기, 그림과 서예, 인문학적 소양의 시간을 쌓으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잘 살아 오신 지난날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이면에는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을 반드시 담보로 한다. 선생님도 어느 한 시절은 사통팔달의 길에서도 서성거려 보셨다. 그 속에서 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거나 또 다른 갈래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해답을 찾는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조연으로 단역으로 역할을 배정받는다. 아직 인생 무대에서 내려오기엔 매력적인 미남 배우 김종철 선생님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중 회억 몇 페이지를 들춰보자.

어릴적 모습
어릴적 모습

지금은 조용한 시골 사람, 황혼의 나에게 시골의 고즈넉함은 선물이다

작정하고 동대리 사람이 되지 않았다.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볼 생각으로 눈여겨 봐둔 곳들을 찾아나서는 길, 차창 밖으로 스치듯이 동대리를 만났다. 25호 가량의 작은 시골동네가 가슴에 확 안겼다. 망설임 없이 마을 언덕배기집에 둥지를 틀고 옥천에 주소를 심었다.

청년시절은 한국타이어에서 산업역군으로 활약하고 동종업계 사업을 하면서 성취감도 맛보고 돈도 벌어보았다. 10년간 한국 타이어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곳에서 더 축적된 경험을 쌓았다.

사업에 대한 자천 타천의 기회를 모아 연구소의 도움과 조언으로 레이싱 타이어 고무 가공회사를 설립했다. 처음부터 승승장구 하지는 않았다. 전략과 계획처럼 사업이 진행된다면 사업은 성공이라는 공식을 낳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한국 타이어에 납품을 하면서 12년간 사업의 역량을 축적해나갔다.

1953년생이다. 어느새 일흔이 되었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내 나이를 말하면 남들도 놀라지만 정작 나도 뜨끔하다. 내가 벌써 70이라고? 되묻는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곡강(曲江)이라는 시 편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인생 기껏 살아본들 70세 라고 했는데 지금 내 나이가 기껏 살아봐야 닿는 그 나이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다.

내 나이를 저울에 올려놓는다면 무게중심이 노년으로 기울 나이지만 요즘의 70은 시이소마냥 정점에서 이리저리 중장년과 노년사이를 저울질하고 있다. 은퇴 후에 어학 수업, 그림 수업, 서예 수업 등 배우는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헬스로 다져진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 노익장을 과시한다고 하는 말도 어색한 그런 나이다.

중학생 시절 모습
중학생 시절 모습

추억 보따리 많은 유복한 학창시절

원 고향은 충주로 5남매 중 외아들이었다. 초등학교는 충주와 단양사이에 나룻배 뜨는 단양팔경 수몰지구 구단양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충주로 중학교 유학을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이 “종철아 큰물에 나가서 공부할 때가 되었다”라고 했다.

충주로 나가서 공부하라고 기회를 주신 아버님. 부모님은 농사도 지으시고 한약재 장사를 하셨다. 시골마을에서는 방귀께나 뀌는 집이라 아버님은 학교 기성 회장을 하시고 나는 그 덕에 동네에서 충주로 처음 유학을 간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초등학교 5학년 후배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해보기도 했었다. 돈이 필요해서 라기 보다 기회가 주어졌고 아버님의 검소한 생활이 내 몸에도 습이 돼서 한 달에 쌀 일곱 말을 받고 아이를 가르쳤다. 소 장사 하는 집의 아들이었는데 그 시절 소 한 마리면 자녀 대학까지 보내는 효자 노릇하던 보물단지라 그 집도 부자 소리 듣던 집이었다.

손재주가 좋아서 바리캉(흔히 바리깡으로 불림)을 사서 친구들 머리도 깎아주고 10원 20원 받는 재미도 있었다. 돈보다는 호기심으로 이발을 해줬는데 그들이 주는 돈이라 마다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볼 성 사납게 보시고 혼내셨다. 한번 웃고 넘어가는 짧은 추억이었지만 지금 나이 들어 수묵화를 배우고 있는데 생각보다 손놀림이 좋아 그림이 제법 태가 난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길들여진 손재주 덕분인지도 모른다. 손재주도 좋고 호기심도 많았던 때다. 추억 보따리가 두툼한걸 보니 나의 10대가 메마르지 않았다는 자조에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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