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종 어르신
유길종 어르신

1944년 유길종

여과지로 우려낸 삶, 불순물이 없어 정갈함으로 방점을 찍다.

옥* 지업사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작은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양은 주전자, 옹기종기 둘러앉은 친구들, 끓고 있는 물처럼 친구의 담소도 따뜻한 훈기를 담고 모락모락 피어난다. 소박한 시골 점방(店房)을 그린 풍경화 한 편이다

도라지 물을 올려놓았지만 하루 종일 끓여서 마시고 물 붓고 또 마시고 물 부어서

사모님이 “이제 맹물됐어요”라고 하시며 싱겁다는 표정이시다. 맹물이 아닌 불순물이 없이 여과된 물이라고 말한들 따져 물을 이도 없을 것이다.

인생도 진한 삶을 살고 여과된 물만 남은들 어떠냐 옹기종기 모여서 한 모금씩 목을 축여주며 끝까지 그 몫을 해낸다. 옥* 지업사 유 사장의 친구들도 도란도란 둘러앉아 훈훈한 품으로 서로를 안았다.

나이 들어 맹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도라지 물을 다 우려낸 후라 역할을 다하고 맹물이 되었다. 맹물만 남았든 기저는 고사리 물이었다. 지금 어르신의 삶도 여과지로 우려낸 삶, 불순물이 없어 정갈할 뿐이다.

돈 버는 대로 유학비로 보냈던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돈 버는 대로 유학비로 보냈던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지업사, 장사의 길에 들어서다

고향 읍내에 00종합기계라는 성업하던 회사가 있었다. 버스가 몇 대씩 움직여 출·퇴근을 시키던 고향에서는 큰 회사다 보니 아무나 입사할 수 없어서 그 흔히 말하는 낙하산 줄 타고 취업을 했다.

막상 큰 회사에 들어가 보니 내 예상과 빗나가는 삶의 방식들을 접하면서 실망과 분노를 같이 맛보았다.

성격 자체가 거짓말할 줄 모르고 원리·원칙주의자인데, 공구관리와 자산관리 일을 분담하게 되었다. 위험한 공구를 다루다 보니 몸을 다쳐서 6개월을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퇴원 후에 청천벽력 같은 일을 알게 되었다. 나 없는 사이에 공구를 007 가방에 넣어나가서 팔아먹는 사건이 생겨서 일이 크게 벌어졌다. 쇠붙이라 다 돈이고 공구 하나가 당시 돈으로 3천원이 넘었으니 007가방 몇 가방만 들고 나가도 제법 돈이 됐다.

지금도 세상사가 내 마음 같지 않지만, 그 옛날에 CCTV가 있기를 하나, 컴퓨터로 장비 정리를 하나 시스템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한 사람만 마음보 잘못 쓰면 열 사람이 지켜도 소용이 없었다.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못 잡는다는 말을 우리 옛 어른들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다 살면서 뼈저리게 겪은 만고풍상 끝에 얻어낸 세상 공부였다.

퇴원 후에 복직하고 많은 사람이 오가며 공구를 사고파는 모습이 다른 때보다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장사를 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공구 장사를 할까? 페인트 장사를 할까 고민을 했다. 건설 경기가 슬슬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필요한 자재들은 많았다.

가게만 차려놓으면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드나들 줄 알았지만, 세상사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40년간 그 자리에 그대로 한결같은 옥* 지업사, 사진 속 인물은 유길종 어르신 사모님
40년간 그 자리에 그대로 한결같은 옥* 지업사, 사진 속 인물은 유길종 어르신 사모님

금구리에 가게를 얻었다. 아내와 장사를 시작하면서 어머니께서 2남 1녀를 키웠다. 일단 가게 얻어놓고 2-3개월 빈 공간으로 두었는데 앞으로는 종이 장사가 잘 될 거라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나는 벽지 종이 장사를 하기로 했다.

장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건 당연한데 당숙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지업사가 많아질 때 3평짜리 가게에 물건을 다 못 채워서 애를 먹었다.

간신히 쟁여놓았던 벽지를 빼면 박스가 쑥 나와서 와르르 무너지고 그 정도 고단한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디서 무엇을 파는지 알아야 물건을 떼어 와서 팔 텐데 대전을 나가서 계속 알아보고 다녔다.

어느 날 대전 중앙시장에 나갔다가 장판 실은 차에서 사람이 내려서 따라갔더니 벽지를 파는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보고 얼떨결에 나도 물건을 가져와서 장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모든 시작이 다 그렇듯이 옥수 지업사의 시작도 참 어설펐다.

고향 읍내에 00벽지를 내고 팔기 시작했다. 유명한 탈렌트 송**의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큰 총판이었는데 인심 좋은 송 사장님 덕분에 처음 시작을 잘할 수 있었다.

처음에 벽지를 가져가서 팔고 돈은 후불로 갖고 오라고 하셔서 큰 힘이 되었다. 사람들한테 인심을 잃지 않았던지 물건이 잘 팔렸다.

마진을 많이 붙여서 팔고 싶지 않아서 내 나름의 계산법으로 장판이나 벽지를 팔았는데 다른 집보다 물건값이 쌌던 모양인지 다른 가게들이 들고 일어나서 난리가 났다.

나보고 덤핑 장사한다고... 마진 덜먹고 많은 사람에게 팔려는 전략이었는데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나는 순박한 사람이지만 나를 건드리면 못 참는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좋은 마음으로 적게 이문 남기고 손님들에게 좋은 일하면서 장사를 잘해보려는 의도였다.

소란스러운 일들을 잠재우고 장사에 매진했다. 우리 옥* 지업사가 고향읍 전체를 장악했다. 나랑 같이 일하는 기사들도 일을 열심히 했다. 벽지만 파는 것이 아니라 도배일도 연결해서 맡았는데 다들 성실하게 일하고 장판도 깔끔하게 잘 깔아주니 손님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성실하고 정직하게 장사하면 손님들이 먼저 알아준다. 모든 일의 원인도 결과도 내 몫이다.

벽지회사에서 우수 대리점주들에게 해외여행 포상을 주다
벽지회사에서 우수 대리점주들에게 해외여행 포상을 주다

‘옥* 지업사’ 40년을 한결같이 성업하다

1980년대가 우리 옥*지업사의 황금기였다. 다들 경기가 좋으니 집도 고치고 건축 붐이 일어났다. 1982년도에 시작해서 40년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우리 자손들은 지업사를 맡을 아이들이 없어서 우리 부부가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대에서 마칠 생각을 하면 아쉽다. 그래도 지업사 일하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우리 부부가 일 잘한다고 벽지회사에서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시골 사람이지만 적당히 누리고 살았다.

우리 아들 외국에서 공부할 때 대전 외환은행가서 달러로 바꿔서 돈 보낼 때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돈 뭉치를 잠바 속에 꽁꽁 숨겨서 대전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 같았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바꿔서 보낼 때는 사실 장사가 잘돼서 유학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지만, 종이 팔아서 벌면 얼마나 벌까.

안 입고 안 먹은 돈으로 모은 돈이라 손이 바르르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 돈으로 우리 아들이 공부 열심히 해야 할텐데...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다행히 돈 보낸 보람이 있어 우리 아들이 사회에서 자리 잘 잡고 있으니 흐뭇하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우리 부부도 젊은 시절 하루하루 알토란같이 살았다. 남들이 우리가 성업할 때 “유사장 장사 잘되는데 건물사지 그래?”라고 부추겼지만 우리는 건물 사는 것보다 자식들 머릿속에 지식 넣어주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후회도 없고 잘했다는 생각이다.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의 한 모습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의 한 모습

돈도 벌고 지역에서 신임도 얻어서 내 고향 땅 잘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정치 현장에도 발을 디뎌보기도 했다.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보았다.

어린 시절 풀죽만 먹고 살다가 그래도 옥* 지업사 하면서 사람답게 살았다. 문중 일 보면서 대종회 부회장 일까지 맡았으니 골고루 사는 맛을 다 보았다.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사람들이 간간이 “일흔 아홉이요? 너무 젊어 보이세요. 웃는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라고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그냥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틀림없다.

모든 건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키는 아내 덕분이다. 내가 독한 마음먹지 않고 험한 말 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내 마음보가 선한 얼굴로 나타난다니 감읍할 따름이다.

저작권자 © 고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