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니스트
박종호 칼럼니스트

한때 대한민국의 건물 외벽과 전신주, 광고판, 관공서 및 산에 표어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많던 구호와 포스터들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면서 경제력이 커지고 국민 의식 수준이 높아진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 60년대 ‘반공 방첩’이 국시(國是)던 시대에는 전국 학생 표어와 포스터 대회가 해마다 열렸다.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식목일을 제정해서 시뻘건 민둥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빨간 글씨의 ‘자연보호’와 ‘산불 조심’ 표어는 거의 모든 산에 서 있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같은 불조심 포스터보다 많은 ‘반공 방첩’과 ‘무찌르자 공산당’, ‘공산당은 싫어요’ 등의 표어와 포스터가 전국 어디에든 붙어 있었다. 70년대에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산아제한 표어가 80년대에는 ‘둘도 많다’로 바뀌었다. 출산율 세계 최하위인 지금 보면 격세지감이다. 수많은 표어 중 가장 많이 접했던 것은 반공(反共) 표어였다. 반공은 승공(勝共)이 되고 멸공(滅共)으로 변했다. 지금은 귀에 낯선 말이 됐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사라졌던 ‘멸공’이란 단어가 최근 새삼스럽게 장안의 화두가 됐다. 신세계 정용진 회장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멸공’이란 단어를 쓰자 폭력적 표현이라고 임의로 삭제된 게 발단이다. 표현의 자유를 무시했다고 정용진 회장이 항의하자 인스타그램이 슬그머니 다시 복구시킨 것이다. 그걸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평소 패기 넘치고 SNS로 청년들과 소통하는 중년 사업가의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조국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멸공’이란 글을 올리는 재벌 회장이 있다. 거의 윤석열 수준”이라고 느닷없이 재벌 회장과 윤석열을 불러서 싸움판을 만들었다. 조국의 만사 참견 본능이 싸움을 촉발했다. 조국 말대로 21세기에 세계 유일의 3대 세습 독재 공산국가를 주적으로 하는 우리가 멸공이란 말을 하면 왜 안 되는가? 중년의 사업가가 자신의 소신에 따라 ‘공산당이 싫어요’와 ‘멸공’이란 말을 하면 왜 안 되는가? 사노맹 출신 조국의 눈으로 볼 땐 당연히 쓰면 안 되는 금기어일 수 있다. 친중과 친북주의자 문재인 정권에서 ‘멸공’은 금기어고 대국인 중국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소국 대통령’ 문재인 앞에서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국이 “거의 윤석열 수준”이라고 뜬금없이 말한 것은 무슨 뜻으로, 왜 했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조국의 말에 윤석열은 이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서 화답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스타벅스와 이마트 및 신세계 불매운동과 정용진 비난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정용진은 자신의 멸공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북쪽 애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정부가 그렇게 감싸는 북한이 새해 벽두인 1월 5일에 마하 6 정도 수준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지만 정부는 극초음속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정밀 조사를 한다고 발표했다. 무능한 국방부다. 엿새 뒤인 1월 11일 북한은 이번에는 마하 10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과시하듯 발사했다. 북한에서 1분이면 서울을 폭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너무 빨라서 요격조차 불가능하다. 핵을 가지고 마하 10의 상상도 안 되는 속도로 쏠 수 있는 미사일을 수시로 쏴대는 북한에 대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 하는 정부의 굴욕적 저자세를 많은 국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워하고 북한의 각종 도발에 대해 제대로 규탄조차 못 한다. 이런 가운데 정용진이 각종 사업적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멸공’과 ‘공산당이 싫어요’를 말했다. ‘멸공’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3대 세습 왕조 국가인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길 말이다. 이미 오래전에 황장엽은 대한민국 내에 약 5만 명의 간첩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간첩행위를 한 통진당의 이석기는 내란 선동 혐의로 실형도 살고 통진당은 해산됐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멸공이라는 말을 했다고 여당은 ‘색깔론’이라고 아우성이다. 북한 김정은은 이미 핵 개발도 끝내고, 마하 10의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리는 주적인데 어떻게 멸공이란 말조차 색깔론이라고 입을 틀어막는다는 말인가. 빨간색을 빨간색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색깔론이란 말인가?

용기 있는 한 사업가 덕에 오랜만에 우리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됐다. 정부의 친북 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일방적 도발을 지켜봐야 했던 답답한 국민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오랜만에 북한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기회도 됐다. 사업가로서 앞으로 예측조차 불가능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한 정용진의 용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대단한 일이다. 국가는 남이 지켜주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한 세기 전 조선은 무능한 임금과 무기력한 각료가 강대국 눈치만 보다가 나라를 빼앗겼다. 그로부터 100년도 넘은 21세기에 우리는 같은 핏줄이지만 전쟁을 일으켰고 핵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의 위협 때문에 불안 속에 살고 초강대국이 된 중국의 눈치만 보고 있다. 세계가 불안한 눈으로 보는데 정작 대한민국만 북한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안보불감증에 걸린 것 같다. 마치 차차 물이 뜨거워지는 솥 속의 개구리처럼 북한의 공갈 협박에 서서히 익숙해져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만 모르는 것같다. 지금이라도 ‘반공’이고 ‘멸공’이라고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소리쳐야 할 때다. 정용진의 외할아버지 이병철은 대한민국 최고의, 세계 제일의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신세계 그룹이라는 재계 10위의 재벌 부회장이 2022년 벽두에 ‘멸공’ 논란을 부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1월 12일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재계 인사들과 만나는 토크콘서트에 재계 10위의 정용진은 초대받지 못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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