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실향민, 수몰마을 피실의 흔적을 가슴에 묻다①
나도 실향민, 수몰마을 피실의 흔적을 가슴에 묻다①
  • 김경희 작가
  • 승인 2022.01.06 2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복용 (1934년~)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만 실향민이 아니다. 어르신도 실향민이셨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멱 감던 시냇가의 추억자리를 잃었다. 대청댐에 수몰지구가 된 덩기미와 피실 고향집도 잃어버렸다. 그리움만 남은 마음의 고향이라시며 당신도 실향민이라는 말씀을 놓치지 않으셨다.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비단 어르신뿐이랴.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면 고향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르신의 인생 한 대목 한 대목을 엿보면서 잠시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 보기로...

이복용 어르신
이복용 어르신

■ 수몰로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

내 고향 피실은 1980년대 대청댐이 완공되기 전에는 30호 정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정겨운 마을이었다. 금강을 앞으로 두고 적은 농사를 지었지만, 이웃이 서로 챙겨가면서 두 끼를 겨우 먹고 살았다. 1979년 수몰지구 마을 이주 대책에 의거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옥천읍 동이면, 아산, 보은 등 전국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우리도 아내의 친정이 터를 잡고 있는 보은 회남 판장리로 터전을 옮겼다.

부모님의 5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은 복자 돌림을 썼다. 위로 갑순이 누님, 복진 형님 그리고 나, 복균 동생, 태균 누이. 언제 불러본 이름인지. 난 학교 다니느라 열아홉까지는 밭일을 안 했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학자 가풍이 있는 집안이어서 부모님은 나를 학자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나는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대전공업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사실 나만 해도 호강한 축에 든다. 다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대전으로 어디 유학을 나올 수 있나, 농사일이라도 거들어야지. 그래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유년 시절,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이산 저산, 이들 저들을 다니셨어. 봄날이면 홑잎을 뜯으러 자주 다녔지. 떡을 할 때도 ‘둘째야’ 부르면 나는 어머니 옆에서 음식 장만을 도왔지. 어머니가 둘째야 둘째야 불러주시면 인정받는 생각에 뿌듯했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는 마음에 또 흐뭇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 사랑이 가장 귀했던 것 같아. 요즘은 부모 자식 사이는 이산가족만 못한 것 같아. 학원이다 맞벌이다 어느 세월에 부모의 정을 알겠어. 하루 종일 홑잎 뜯고 고추 따고 갖가지 심부름하면서 들었던 깊은 정을 무슨 수로 알겠어. 어릴 적 동네에서 친구들과 뛰놀다가 해방을 맞았어. 동네서 어른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흥겹게 춤을 추더라고. 그때는 태극기도 변변치 못해서 농기를 흔들었지.

■ 전쟁을 알리던 날선 사이렌 소리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6.25를 맞게 됐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는 6.25사변도 천천히 왔지만 대전에 있던 나는 날선 긴장감으로 6.25를 맞이했다. 대전공업학교 2학년 때였다. 대전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시내에 사이렌이 울리고 난리도 아니다. 전쟁이 났다고 들었어. 너희들 어떡하니”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전쟁이 났다고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하셨다. 가슴이 두근두근했지. 나는 공부하던 책상을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어서 책상을 대충 끈으로 묶고 등에 짊어졌어. 왜 그랬나 몰라,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그 책상을 두고 올 수가 없더라고. 정이 들었는지. 다시는 못 돌아갈 학교 같았는지. 그 무거운 걸 미련하게 짊어지고 더퍼리 옆 지실재를 넘어서 자양초등학교 날망 동면 지나서 모래재를 넘고 다시 배치재를 넘어 옥천까지 무작정 걸어갔다. 그땐 고개가 왜 그리 많았는지. 나루터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 배를 타고 시골마을로 들어갔다. 전쟁이 났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두렵기도 하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 무거운 책상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6월의 그 여름을 무작정 걸었으니 순진한 건지 미련한 건지 말이야. 무슨 드라마 같지만 그게 우리 살아온 이야기다.

나루터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마을에서 나온 뱃사공이 끌고 나온 배를 타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고향집에 가보니 전쟁이 터지던 날도 마을 사람들은 바삐 밭일을 갔고, 어머니는 무심한 듯 밥 한술을 떠주셨다. 면장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처세를 잘한 덕분에 마을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다른 마을들은 좌파를 학살시켜서 보복을 당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런 비극은 없었다. 하지만 피난처 역할을 하느라 분주하기는 했다. 아버지가 한학자여서 서울에서 피난 온 양반들에게 집을 내줘야 할 때가 많았으니까. 오후 3시에서 4시만 되면 북적북적했다. 어떤 날은 사랑방도 가득 차서 우리 식구 잠자기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전쟁 기간 한문 공부와 농사일을 하면서 지냈다. 전쟁 중에 망중한을 가졌으니 얼마나 촌구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양시민과 함께하는 고양일보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31-908-2255 / 010-9907-2289

고양일보 후원하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