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현 동의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박철현 동의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고양일보] 과거 동구권이 붕괴되기 전에 우리 범죄학자들이 갖고 있던 상식은 사회주의 국가의 범죄통계는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자신들 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통계를 축소·왜곡하여 보고하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굳이 범죄통계를 국가가 축소·왜곡하여 발표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범죄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일부 갈등이론을 이해한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통계 왜곡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갈등이론가 퀴니(R. Quinney)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범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자본가들이 저지르는 범죄로서 노동자들을 무리하게 통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제 범죄나 정부 범죄 또는 기업 범죄들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가들의 착취에 의해 곤경에 처한 노동자들이 범하는 절도, 강도와 같은 적응범죄와 통제에 저항하는 저항 범죄들이다.

퀴니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범죄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범죄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범죄가 발생하지 않으며, 발생하더라도 매우 미미한 수준이라는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동구권과 중국의 개방 이후 알려진 실상은 이와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큰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탈북자들을 통해서 알려진 북한의 범죄 실상은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범죄가 발생한다. 절도・횡령・수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특히 퀴니가 말하는 정부 범죄와 유사한 범죄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마르크스주의 범죄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큰 차이 없이 많이 발생하는 사회주의권의 범죄에 무관심을 넘어서, 이들에 대해 눈을 감아왔을까?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내재하는 ‘목적론적 오류’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으로서의 학문과 사회운동으로서의 학문이 혼재되어 있다. 후자를 중요시하는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보통 사회주의운동을 위해서 ‘사회주의에 이로운 쪽으로 학문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범죄 통계 왜곡은 이런 강박감을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보통 후진국에 비해 선진국의 통계는 신뢰성이 높다. 선진국이 될수록 각종 정책 수립에 있어서 통계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통계를 보다 가치중립적으로 수집하고 발표해야 한다는 믿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분류되기 시작한 한국의 통계 신뢰성은 높아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이미 지난해에 불거진 통계청의 ‘통계마사지’ 의혹은 이런 정부 통계의 신뢰성에 큰 상처를 가져왔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도 불구하고, 분배지표 등이 오히려 퇴보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새로 임명된 통계청장이 통계조사방식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질문방식을 살짝 바꾸어 이전 통계와 비교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든지, 표본에서 저소득층 비율을 이전에 비해 줄여 소득지표가 개선된 것으로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뉴시스 2020.10.14.일자 기사 참조).

이런 이미 보도된 것 외에도 교묘하게 이전과 비교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들이 더 있다. 나는 2010년부터 ‘사회문제론’이라는 교재를 출간했고, 거의 2년에 한 번씩 개정판을 내오고 있기 때문에, 이런 통계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전에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현황을 3월과 8월 기준으로 발표해왔고, 나는 교재에서 2010년 이후 3월 통계를 수록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통계청은 이런 3월 기준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8월 기준 통계만을 발표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 하위 유형 중에 기간제 노동자 수를 2018년 이후 발표하지 않는다. 통계의 생명 중의 하나는 연속성인데, 왜 과거에 계속 발표해 왔던 통계를 발표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이것이 정부가 세금을 들여 대거 만들어 놓은 얄궂은 단기 일자리들이 3월에 없어지기 때문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 외에도 통계청은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 집계방식을 변경했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얻지 못한 듯하다.

왜 이렇게 유독 이 정부에서만 이런 고용 및 불평등 통계를 건드리는 것일까? 내가 이번 교재 5판에서 이 부분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통계수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닌, 단지 발표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학계의 연구윤리 기준에 따르면, 이것은 중요한 연구윤리 위반의 한 유형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연구 결과, 소득이 오른 사람이 30%이고, 소득이 감소한 사람이 70%였을 때, 70%를 감추고 30%가 소득이 올랐다고 보고한다면 연구 결과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통계를 작성하는 사람이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오래 동안 유지되어 오던 시계열을 끊는 것 또한 윤리적으로 비난할 만한 것이다.

나는 이런 다양한 통계 왜곡이나 마사지 의혹의 배경에는, 이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목적론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大)’를 위해서 ‘소(少)’를 쉽게 희생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대에서나 통할 만한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민주사회를 위협하는 적들이다.

얼마 전 나는 세네갈에 새마을운동을 전파하러 가 계시는 모 박사님의 유투브를 보다가 이런 통계의 왜곡과 관련한 언급을 듣고, 남의 일같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의 통계는 그 통계를 인쇄한 A4용지 한 장의 가치보다도 못하다”고 했다. ‘통계는 한 나라의 국격과도 같다’ 우리 정부의 통계가 이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통계청의 공무원들이 더 공정하게 통계를 수집하고, 우리 국민이 눈을 더 부릅뜨고 이들을 감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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