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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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이후분 어르신

운명이라는 말로도 위로가 안 되는 삶이 있다.

어르신은 스물한 살에 남편을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눈망울 맑은 두 살 아들과 험난한 세상에 내 던져졌다.

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2년을 살고 어르신 인생은 앞길을 짐작할 수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독하고 기막힌 세월을 거슬러 한 많은 삶은 아흔두 해를 지나고 있다.

그 세월을 어찌 살아내셨을까요. 존경합니다. 당신의 삶을...

해바라기
손녀딸이 그려준 해바라기 그림, 이후분 어러신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다.

■ 아픈 기억 그 너머의 아련한 추억들

대전도 나에게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망망대해와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옥천에서 가깝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마음이라도 고향 곁에서 머물고 싶어서 대전에서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전 와서 소제동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미제 물건을 좀 팔다가 포목점에서 일을 배워서 역전 중앙시장에서 포목장사를 시작했다. 내가 한복을 입고 앉아있으면 다들 한복 맵시가 곱다며 손님이 하나둘 줄을 잇기 시작했다. 내 나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한 땀 한 땀 온갖 정성을 들여 한복을 만들었다. 내 솜씨로 지은 한복을 입고 시집 장가갔던 신랑 각시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한창 포목경기가 좋을 때라 돈도 벌고 아들 하나도 잘 키워서 아들은 박사가 돼서 탱크를 만드는 연구원으로 00연구소에서 퇴직했다.

지금은 은퇴 후 귀촌한 아들과 같이 영동에 살고 있다. 아들 내외의 보살핌 속에서 늙고 병든 내 몸을 운신 중이다.

코흘리개 때부터 시작된 운명의 장난이 너무나 힘겨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내 몸과 정신을 꿋꿋이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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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유혹을 다 참아내고 아들 하나 보고 살았는데 아들 그늘에서 따뜻하게 몸을 지키고 있다.

어쩌면 내가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그 마지막 혜택을 보는 운 좋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인내는 쓸고 열매는 달다더니 마치 내 인생을 얘기하는 것 같다. 비빌 언덕 하나 없던 척박한 자갈밭이던 세상에 홀로 던져졌던 나, 아들 하나 의지하면서 죽을 각오를 하면서 살아냈다.

운명이라는 말로도 위로가 안 되는 인생이었는데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인 듯이 살아냈더니 결국 끝내 웃는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내 인생이 더 남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로 지금의 나를 안아준다.

인생 희로애락의 값은 같다. 매일 저울질 하느라 힘 빼지 말고 그저 주어진 오늘을 잘 살면 내일이 또 찾아온다.

허나, 오늘 좋았다고 내일도 좋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오늘 나쁘다고 내일도 나쁘다는 법 또한 없다.

누구에게 기댈 것도 없고 내 몸도 내가 지키고 내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된다.

가족이며 벗이며 내가 존재해야 곁에 머문다. 더불어 살되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다.

‘오늘의 나에게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내일이 또 찾아온다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적이다.

아, 90년 멀리도 왔다. 내 묘비명은 진즉 정해놓았다. 촌 할매지만 근사한 말로 ‘아픈 기억보다 따뜻한 추억과 그리움이 많은 여자로 살다’

아들 편지.

어머니 참 무심했습니다.

고생하신 어머니만 알고 있었지, 어머니 마음속의 회한까지

살피지 못해 죄송합니다. 못난 아들을 용서해주세요.

한복 일하시면서 수도 없이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시고

손가락의 피를 빨던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히 사랑한다는 말로도 감사를 전하지 못합니다.

이제 은퇴하고 돌아와 저 편하자고 시골에서 어머니 품에서

지내는 불효자입니다.

바느질하면서 저하고 싶은 공부 끝까지 하게 해주신 은혜를

제가 어찌 갚을 수 있을까요.

그저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부족한 우리 부부, 이해해주시고 어머니와 아침마다 겸상해서

밥을 먹는 것만도 너무 감사합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저희 곁에 함께 해주세요.

못난 아들, 부족한 며느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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